내가 사랑하는 것
“선생님의 인생 책 목록을 알려주세요.”
카톡이 왔다. 고등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네가 이 책만큼은 꼭 읽었으면 좋겠어.”라는 메시지가 담긴 청소년을 위한 교사들의 독서 에세이를 책으로 같이 내보자는 제안이었다. 인생 책 목록이라... 답을 하려고 떠올려 보니 중학생 때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폭 빠져 읽었다. 몰입하면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한 책들. 재미는 있었지만 추리소설을 인생 책이라고 하긴 뭔가 부족하다. 이해인 수녀의 시집 『민들레 영토』에서 「친구에게」라는 시를 필사해서 단짝 친구에게 건네주었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생 때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의 주인공이 굉장히 멋지고 낭만적인 사람이란 느낌으로 남아 있다. 퇴직을 하면 크눌프처럼 전국의 친한 선생님들의 학교에 방문해서 차나 술을 한 잔씩 하며 일주를 해야지 결심했다. 대학 때는 『녹 슬은 해방구』라는 북한 장편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등굣길에 지하철로 한 시간 이상을 갔기 때문에 앉아서 야금야금 읽으며 갔다. 평범한 주인공이 혁명의 주체로 변모하는 극적인 모습에 쉽게 감동했다. 그 이후 읽은 북한 소설들의 구조는 거의 다 비슷했지만 설득력 있게 잘 쓰여져 각각의 감동이 다 달랐다.
『당신은 당신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입니다』는 결혼 후 아이가 어릴 때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발도르프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모습을 보고 왜 저런 거냐고 질문하는 아이에게 과학적인 설명이 아닌 들숨과 날숨에 비유해서 말해주는 발도르프 교육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은 텔레비전을 사주지 않는 거라는 글을 읽고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의 동의를 얻어 TV를 없앴다. 이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 우리 집엔 TV가 없고 불편도 전혀 없지만 스마트 폰이 아이 손에 들려진 고등학생 때부터는 공부도 독서도 물 건너갔다.
인생 책을 고를 때, 나만 좋았다고 고를 수가 없고 학생들에게 추천하기에 좋으면서 내가 에세이로 쓰기에도 좋은 책을 선택하려다 보니 착한 책들을 손에 집게 되었다. 장혜영의 『어른이 되면』, 파커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이국종 교수의 『골든 아워』, 김소연의 『시옷의 세계』나 『마음 사전』. 이 중에 나는 『마음 사전』으로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친구랑 크로아티아 여행을 갔을 때 아침마다 침대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주던 친구 목소리가 너무 다정했고, 아이들에게 그런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갑자기 일이 생겨 책 쓰는 일은 다른 분에게 넘겼지만 인생 책을 떠올렸던 시간은 아련한 시간여행이 되어주었다.
책에 뭔가 좋다고 나오면 바로 따라 실천해보는 나여서 좋은 책을 잘 골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극우 책을 읽었다면 지금 나는 극우성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뭐든 일이 생기면 관련 책부터 찾아 읽는다. 마음이 힘들거나 고민이 생길 때 답을 줄 거 같은 책을 뒤적이다 보면 정말 답이 눈에 들어온다. 내 고민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답, 네가 지금 그렇게 힘든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답,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는 말들이 신기하게 눈에 쏘옥 들어오면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경험이 많았다. 가끔은 책으로 배울 일이 아니고 몸으로 배워야 하거나 직접 부딪쳐야 하는 일인데도 책을 집어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마치 키스를 책으로 배우려는 사람처럼. 그런 나의 어리석음을 지금은 사랑한다.
내 맘이 평화로운 시기에 책을 읽을 땐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 이 책은 J에게 권해주면 마음의 힘이 생길 거 같아. 공부에 관심이 많은 P에겐 『완전한 공부법』을 권하면 생각이 더 넓어질 거야.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A에게는 『기분이 없는 기분』이 마음을 알아주는 생각이 들 거 같아. 박연준 신간이 나왔네. 이 작가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 재밌거나 감동적인 책을 발견하면 교실에 들고 가서 반 아이들에게 신나게 소개한 다음 학급문고 책꽂이에 꽂아둔다. 한 명이라도 관심 있게 읽어주면 기분이 좋다.
책은 영혼의 식량이 되기도 했지만 몸에 직접 영양을 공급하는 데 중요 역할을 했다.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집밥 반찬을 만들 때 참고하는 요리책이 세 권 있다. 『이천 원으로 밥상 차리기』, 『누가 해도 참 맛있는 나물이네 밥상』과 한살림에서 발간한 요리 자료집이다. 요리를 못하고 융통성도 부족한 나는 요리책에서 하라는 대로 작은 술, 큰 술, 한 컵 등등으로 딱 맞게 계량해서 반찬을 만들곤 했다. 적당히 넣으라고 알려주는 사람의 레시피가 제일 어려웠으니까. 자주 만든 반찬은 지금도 애용하는 오징어덮밥, 아들이 어릴 때 자주 해 먹던 궁중 떡볶이, 겨울에 뜨끈한 콩나물 국밥, 양념 얹은 두부 부침, 여름에 오이지무침, 국은 단연 소고기 미역국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 얘기하는 자리가 좋아서 전국국어교사모임 독서교육분과 모임인 『물꼬방』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책 얘기를 하고, 권하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라서 만나면 끝도 없이 펼쳐지고 흥미진진한 네버앤딩 스토리 속에 폭 들어가 있는 기분 좋은 시간이 된다. 물꼬방 사람들은 책 때문에 만나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선하고 열정적이다.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살까 싶은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을 실물 영접하는 시간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고 다시 기운을 내 살고 싶게 한다. 좋은 책이 좋은 기운의 사람을 만드는 걸까, 좋은 사람들이 좋은 책을 고르는 걸까?
오 년 전 은유 작가의 글쓰기 수업에 다닐 때는 편견을 깨주는 좋은 책들을 꽤 읽게 되었다. 『아무튼, 피트니스』, 『여자 전쟁』,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어른이 되면』, 『다섯째 아이』, 『나의 두 사람』,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이 좋았고 누구나에게 권하고 싶다.
독서토론모임은 좋아, 좋아. 하다 보니 여럿을 동시에 하고 있다. 동네 친구 셋이 독토를 하고, 혁신학교에 근무할 때 수업 친구였던 선생님들과의 모임에서도 매달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매달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소소책방도 7월부터 참여하고 있다. 광주하남 지역 모임의 선생님들과도 매달 한 번씩 돌아가며 권하는 책을 읽고 있다. 이번 달 모임 책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이 중 하나는 거짓말』,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이다. 책은 혼자 읽을 때도 좋지만 역시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제맛이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고, 내가 생각지 못한 넓은 세계를 만나는 통로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은 너무너무 넓고, 사람은 별별 사람이 다 있고 그 속에 나는 정말 먼지같이 작게 느껴진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심심하면 책을 펴드는 사람, 바빠서 책 한 줄 못 읽으면 제대로 사는 거 같지 않은 기분이 되는 사람. 술이나 커피, 게임, 종교처럼 중독적으로 빠져드는 대상이 뭐냐고 물으면 단연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