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줄, 2955-3025번 서랍
아홉 번째 줄, 2955-3025번 서랍을 열다.
아버지와 새엄마, 새언니, 그리고 나와 동생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면 된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뒷좌석을 돌아보며 "여기는 네 엄마 외갓집이니까 예의 있게 행동해"라고 말했다. 우리 엄마는 외갓집 없는데, 새엄마의 집을 말하는 듯했다. 그곳은 우리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에 가짜 외갓집이 생겼다. 들어선 집에는 낯선 사람들과 아이들이 가득했다. 박서방 왔느냐는 께름칙한 인사가 들리고, 새언니는 당연히 본인의 외갓집일 테니 뛰어 들어갔다.
나와 내 동생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둥글게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 서게 됐다. 자신의 큰 딸과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소개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그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만 따갑게 느꼈다. 그들만의 인사치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숨이 턱턱 막혀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저녁을 먹었던 기억이 있으나 사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에 몇 숟갈이나 넣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고, 심심해하는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근처의 놀이터로 향했다.
따라 나오는 어른이나 또래는 없었지만 차라리 나았다. 저들만의 눈물겨운 가족쇼를 보고 있자니 먹었던 저녁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동생은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우리는 서로 속사정을 털어놓고, 둘이라도 잘 지내자고 말할 만큼의 정서적 여유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두려웠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짧게 단 둘이 있을 때만 가능한 말이었다. 내 공책 어딘가에 꽁꽁 숨겨둔 엄마의 증명사진 단 한 장을 들여다보는 게 서로를 향한 말없는 위로일 뿐.
나와 내 동생에게 처해진 가혹한 상황 속에 그 어디에도 선택지는 없었다. '오늘 새엄마의 외갓집에 갈 건데 혹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지', '사실 너희에게 말하기 어렵지만 새엄마가 생길 수도 있다', 하물며 '네 엄마와 이런저런 일들로 갈라서게 되었다'라는 그런 작은 배려조차 없었다. 언제나 통보였고, 아버지도 엄마도 가장 악질적이고 미웠던 것은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어라 표현할 길도 없는 이 이상한 가족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은 확신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 엄마는 우리를 버렸으며,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이룬 가정을 사랑한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려 해도 내게는 엄마가 당부한 동생이 남아있다. 이 어린 동생과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허탈함과 허무함으로 하루하루 버텨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밤, 새엄마는 우리를 깨워 안방에서 자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비몽사몽 한 채로 안방에 들어서니 초인종 소리가 계속 들린다. 초인종 소리는 나는데 답하는 소리는 없고 대문이 열리는 기척도 없다. 방문을 슬쩍 열어 내다보니 인터폰 앞에서 새엄마와 아버지가 서 있다.
인터폰 화면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할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