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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Mar 10. 2021

[이장욱]실종

실종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무것도 회상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내 발이 지상을 떠나가는 풍경을

행인들은 관람하였다.

내 눈썹과 입술과 또 어깨가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실종 중일 때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누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햇살 속에서

두 팔을 한껏 벌렸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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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가 있다. 한쪽의 모래가 흘러 반대쪽의 시간을 탄생시킨다. 내 쪽의 모래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 반대쪽의 모래가 채워지는 순간, 비로소 시간은 시작된다. 텅빈 모래시계의 구조물은 그 내부에 모래가 없다면 의미를 상실한다. 모래는 모래일 뿐이지만 모래시계 안에서는 미립의 시간이다.


모래+시계구조물이라는 질료에 '시계'라는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총체다. 모래는 모래의 바깥, 시간에서 태어난다. 모래가 해변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은 시간에 관여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세계, 그것이 나의 존재됨과 사라짐을 규정한다. 어떤 풍경 속에 있느냐에 따라 나는 다른 존재다.


이를테면 신화라는 총체에서 태어난 개인은 신화시대의 인간이다. 그의 의미는 신화적 세계의 메타포 속에서 설명될 때 완벽해진다. 근대의 인간은 근대라는 총체가 시간과 거리의 새로운 규격을 창출하며 완성되었다.


문제는 세계라는 총체적 풍경에 대한 개인의 전략이 허용될 것이냐, 혹은 어떻게 허락될 것인가에 있다. 즉 개인이라는 존재가 어떤 자율성을, 혹은 결단을 감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결단으로, 존재는 세계의 풍경을 찢고 존재 자체로 현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의 부름Calling을 받은 이들이 그러했다. 선지자와 현자의 목소리가 혹은 혁명가의 구호가 그들을 새로운 풍경으로 안내했다. 정오에 울리는 싸이렌 소리가 근대의 풍경을 소환하는 순간 '날개'의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낙하한다.


이 세계에서의 실종은 다른 세계에서의 출현일 수 있다. 그것, 즉 다른 세계를 선택할 권리는 없지만, 그것은 도처에 출현한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구조화된 '내일'이 출현하듯, 우리는 끊임없는 풍경과 세계의 반복적 출현을 매순간 마주한다. 초당 24프레임의 이미지가 눈앞을 스쳐가는 극장처럼 우리는 세계를 목격한다. 그리고 세계의 일부가 된다.


모래에게는 해변과 시간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겐 그런 순간이 온다. 어떤 선택이 그의 풍경을 찢는다. 어떤 목소리가 찢어진 풍경 너머에서 들린다. 그는 실종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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