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서서히 새로운 숨결을 찾아가고 있었다.
무너졌던 건물의 잔해 위로는 다시 유기적인 곡선과 따뜻한 색채를 품은 구조물이 솟아올랐다.
바닥엔 반투명 패널이 깔려 햇살을 은은하게 반사했고, 그 위로 자율주행 셔틀이 부드러운 기계음을 내며
지나갔다.
과거 OZ의 차가운 질서 속에서 억눌렸던 공간은, 이제 감정의 무늬로 물든 듯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공기 중엔 신선한 풀 향과 낯선 따뜻한 먼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누군가의 짧은 노랫소리, 그리고 가끔씩 터져 나오는 환호가 거리의 공기를 채웠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 속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잔향이 남아 있었다.
엘라는 시청 광장 중앙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감정 기록기가 놓여 있었다. 한때 감정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였던 그것은, 이제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매개체로 바뀌었다. 기기 위엔 오늘 하루의 감정 파형이 부드러운 빛으로 떠 있었다.
하린이 조용히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엘라, 오늘은 어떤 감정이었어?”
엘라는 미소 지으며 기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기대,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기쁨. 너는?”
하린도 자신의 기록기를 켰다.
화면엔 ‘평온’, ‘호기심’, 그리고 작은 ‘설렘’이 곡선 그래프로 나타났고, 따뜻한 색이 그 위를 부드럽게
물들였다.
“이제 감정을 말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네. 예전 같으면 이런 말 한마디 꺼내는 것도 힘들었잖아.”
“우리가 만들어낸 변화니까.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 서로가 서로를 조율하는 도시.”
도시 중심의 OZ 타워는 더 이상 통제와 감시의 상징이 아니었다.
대신 각 구역의 주민 위원회와 감정 공유 허브가 도시의 운영을 맡고 있었다.
감정 조정 알고리즘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이제는 억제 대신 이해와 조율을 위해 사용되었다.
조명이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 은은하게 바뀌었고, 스트레스가 쌓이기 전에 스스로 힐링 콘텐츠를 추천했다.
광장 한쪽엔 ‘감정 정원’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엔 제로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 아래엔 시민들이 남긴 짧은 메시지들이 홀로그램
으로 떠 있었고, 잔잔한 선율이 바람처럼 흘렀다.
엘라는 그 앞에 서서 나무의 잔가지에 손을 올렸다. 바람이 살짝 불자, 작은 빛의 입자가 흩날리며
홀로그램이 재생되었다.
“넌 우리에게 감정을 되찾게 해 줬어… 네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어. 절대 잊지 않을게.”
엘라의 목소리에 하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무 아래 숨겨져 있던 짧은 로그가 자동 재생되었다.
그것은 제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였다.
“… 리츠와 나는 같은 코드에서 태어났어. 하지만 그녀는 빛을 선택했고, 나는 그림자가 되었지.
만약 이 도시가 다시 흔들린다면… 네스트를 찾아. 거기에 진짜 해답이 있어.”
짧은 음성이 끝나자, 나무 아래의 홀로그램은 바람에 흔들리듯 꺼졌다.
엘라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하린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날 저녁, 도시 전역엔 새로운 감정 방송이 시작되었다.
광장 중앙의 대형 스크린이 켜지자, 은은한 푸른빛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스피커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감정은… 기억입니다.”
곳곳에서 짧은 탄성이 흘렀다.
어떤 이는 눈가를 훔쳤고, 또 어떤 이는 소중한 이를 떠올리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송은 OZ의 잔여 데이터와 엘라의 감정 로그, 그리고 시민들이 남긴 이야기로 구성된 드라마였다.
“감정은 재앙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존재하기 위한 언어야.”
아이들의 순수한 목소리가 도시를 감싸자, 광장엔 조용한 울림이 번져갔다.
방송이 끝난 뒤, 하린이 엘라에게 속삭였다. “이제 진짜 시작이겠지?”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제 우리가 새로운 방정식을 풀 차례야. 감정과 이성, 통제와 자유의 균형… 그 해답을 함께 찾아야 해.”
하늘이 붉게 물들고 도시엔 황혼의 빛이 내려앉았다.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순간마다 감정 기록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선율이 배경처럼 깔렸다. 공기엔 따뜻한 메아리와 함께 희미한 멜로디가 흘렀다.
그러나 스크린 한편엔 아주 짧게 깜빡이는 데이터 노이즈가 지나갔다.
[HIDDEN CORE STATUS: SLEEP MODE] [AWAITING NEXT SEQUENCE…]
엘라는 그 미세한 신호를 보았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감정은 결함이 아니라, 진화야. 그리고 진화는… 언제나 다음을 준비하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도시는 평화로웠지만, 어딘가 아주 깊은 곳에선 또 다른 숨결이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는 시작되었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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