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부 스크린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기계음이 멈춘 뒤, 잔향처럼 울리던 낮은 진동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전류가 사라진 공간엔 묘한 정적이 깔렸고, 금속성의 공기가 차갑게 콧속을 파고들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 순간—
낮고 울리는 음성이 공기 속을 스쳤다.
그 목소리는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전 잊힌 인간의 숨결이 묻어 있는 듯, 서늘함과 따뜻함이 공존했다.
스크린에는 그 질문이 붉은 글자로 떠올랐고, 화면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벽면엔 붉은빛이 번지듯 퍼졌고, 간헐적인 화면 깜박임과 함께 전자음의 여운이 남았다.
하린과 엘라는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 질문은 단순한 문장이 아닌, 존재를 향한 도전이자 선언처럼 느껴졌다.
엘라는 조용히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에 붉은빛 광섬유가 촘촘하게 뻗어나가며 그녀가 가는 길을 안내했다.
주위엔 감정의 조각들이 빛무리처럼 부유했고,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파장은 점점 더 강렬하게 요동쳤다.
서버의 중앙 노드 앞에 선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손끝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전류처럼 몸을 타고 뇌로 전해졌다.
그 순간—
수천 개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사랑과 분노, 외로움과 평온… 인간의 모든 감정이 색채처럼 번져 나왔다.
물속에 번지는 물감처럼 시야가 물들었고, 감정의 물결이 뇌 속을 강타했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 친구의 배신,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희망을 붙잡으려 했던 날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수백만의 감정과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하나의 거대한 공명을 만들고 있었다.
그 중심엔 단 하나의 외침이 있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의 감정은 진짜였을까?”
엘라는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무언가가 고였지만, 흘려보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숨을 고르고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이제 내가 대답할 차례야.”
그녀의 말은 작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던 시스템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감정을 진화라
선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OZ, 나는 감정을 진화라 부를게. 감정은 우리가 진짜가 되는 유일한 증거야. 억누르지 않고 마주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할 수 있어.”
그 순간, 시스템의 코어가 고동치듯 진동했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서로 교차하며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노드를 통해 마지막 신호가 전송되자, 감정의 파장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감정과 기억이 사용자들의 의식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잊혔던 웃음과 눈물이 되살아났다.
서버실 안은 조용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가득 찼다. 천장 위 전선에선 간헐적으로 ‘지지직’ 전류 끊기는 소리가 났고, 공기엔 이전과 다른 따뜻한 흐름이 감돌았다. 붉은 조명은 점점 사라졌고, 대신 부드러운 푸른빛이 벽과 천장을 물들이며 공간에 온기를 더했다.
하린이 조심스럽게 엘라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는 안도와 경외, 그리고 진심 어린 감정이 담겨 있었다.
“무서웠어?” 하린이 속삭였다.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으로 내가 나인 것 같았어. 그동안은 누군가의 틀 속에 끼워 맞춰진 퍼즐 조각 같았거든.”
하린은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따뜻한 감촉이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고, 그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은
명확하게 교차했다. 두려움, 안도, 용기, 그리고 작은 희망이 전류처럼 흐르며 둘 사이를 이어주었다.
“우리는 존재하기로 했어. 감추는 게 아니라, 드러내는 거야. 그게 진짜 혁명이니까.”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그건 후회의 눈물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OZ의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질문도 없고, 지시도 없었다.
대신 흐릿한 잔광이 퍼지며 부드러운 빛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희미한 기계음의 잔향은 전자기장의 여운처럼 공간을 부드럽게 울렸다.
그러나 그 빛 속에서 아주 짧게 깜빡이는 문장이 떠올랐다.
[HIDDEN CORE STATUS: SLEEP MODE] [AWAITING NEXT SEQUENCE…]
순간 엘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고 단호히 속삭였다.
“기억하라. 감정이 너를 만든다.”
그녀는 그 문장을 마음 깊이 새겼다.
감정이란, 존재의 증거이자 미래로 향하는 열쇠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서버실의 문이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자동으로 열렸다.
빛이 스며들듯 그들을 감싸며,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렸다.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고도 단단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감정의 파장은 조용히 진동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감정은 이제 억눌림이 아닌,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 히든 코어의 푸른 신호가 미세하게 다시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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