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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 Mar 24. 2023

발리에서의 어느 하루

(발리는 분명 훌륭한 관광도시이지만)               


발리에서 족자카르타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끊고 나는 마지막으로 우붓 거리를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걸어보아도 도대체 이 빌어먹을 곳은 뭐 하는 동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인들, 특히 백인들은 호주에 가깝고 물가가 싸고 아름다운 이 섬을 열심히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곳으로 개조시켜 버렸다. 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 넘어온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되어 버린 이 인조 도시는 언뜻 보기엔 섬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힌두교의 탑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독특성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정말 고유한 관광 도시처럼 느껴졌다. 물론 섬 안의 작은 섬으로 다시 이동하면 아름다운 해변들이 많겠지만 장대한 칸쿤의 해변이나 제주의 해변과 비교하기에는 특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아무도 인니어를 쓸 필요가 없으며 드물게 운행되는 승객 없는 공공버스에서나 정겨운 인도네시아의 노래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노래는 마치 그들의 음식처럼 한국인들의 입맛에 꽤 잘 맞는데 말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매운 것을 좋아하는 매운 것에 미친 사람들이기도 하다. 물론 주요한 관광지의 배후 지역에서 발리인들은 매일의 전투를 준비하며 열심히 자신들의 노래를 듣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2시간쯤 여기저기 걷다 보니 몸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하고 자칫하면 아플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클 K에 들어가 제로콜라와 스프라이트 중에서 열심히 고민하다 스프라이트를 골라 들고 밖의 의자에 앉아 버렸다. 옆에는 미국에서 온 흑인 분이 앉아 있었다. 아마 가족단위로 온 것 같았는데 아이들이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 다섯 시쯤이 되자 비가 쏟아진 것이다. 나는 자리 잡고 있던 의자를 조금 뒤로 당겼는데 택시 호객을 하고 계시던 기사분이 내 옆자리에 앉으시면서 나에게 좀 더 뒤 위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고맙다고 하고 기사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편의점에서 아이들과 가족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비가 온 지 30초도 되지 않아 두 명의 상인이 비옷을 팔기 시작했다. 하나에 30000루피아, 한국돈으로 2500원쯤이니 꽤 비싼 가격이었다. 족자카르타 역에서 비가 내려 10000루피아에 샀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도 비가 오니 이 가격이지 하며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는데 여기는 뭐 발리니까. 그렇게 우비를 한 두 개씩 팔다 그 가족에게 한꺼번에 5개를 150000루피아라는 거금에 팔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 계시던 기사님이 농반진반으로 그러면 택시를 타라고 그 값을 할 거라고 드립을 날렸다. 사실 그 돈이면 이코노미 기차로는 자바섬의 끝과 끝을 24시간 횡단할 수 있는 가격이기는 했다. 나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져 버렸고, 살짝 애매해지신 우의 파시는 분을 제외하고는 다들 터져 버린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행 내내 택시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님들은 거의 기계적으로 거절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공손하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그분들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반둥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호객을 거절하며 tidak mau(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자 기사분이 tidak mau?라고 조금 불쾌해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인도네시아의 택시 기사들은 미얀마 정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전투력이 낮은 축에 드는 점잖은 분들이었고 자바인들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이미 앉아 있었던 나에게는 택시를 권하지 않았지만 그 가족들은 이미 몇 번이고 택시 호객을 거절했었다.                 


 그 순간 모두 그 택시 기사님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후 비가 그칠 때까지 대충 30분 정도 천천히 같이 앉아 있었다. 나는 L과 채팅을 그는 자신의 지인들과 연락을 하며 종종 '택시'라고 외치며 호객을 했다. 기사님은 옆의 노점에서 익숙한 나시 분쿠스를 주문했다. 나시 분쿠스는 족자에서 바뉴왕기까지의 힘들었던 이코노미 기차에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정차한 기차 부근의 노점에서 단돈 7000루피아에(600원쯤) 밥과 작은 닭 한 조각, 잡재 조금, 야채 그리고 소스를 넣어 섞어 종이에 묶어 파는 도시락인데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기사님이 먹겠냐고 해서 나시 분쿠스냐고 먹어 본 적 있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조금 인니어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기사님은 약간의 인니어와 영어를 섞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지금 이야기를 친구에게 이야기했다고 했고, 기사님은 자신의 친구가 가구업을 하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음료를 하나 산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차를 주문했다고 했다. 평소에 웬만하면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지 않는 편인데 용기를 내어 사진 한번 같이 찍자고 했더니 흔쾌히 찍어 주었다. 남미 여행에서 단 한번 청했던 사진처럼 이 사진도 한번 기억에 남기고 싶다.

(주황색 옷을 입은 뒷모습이 바로 그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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