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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 Mar 23. 2023

더 글로리 - 모범적인 복수란 존재하는 것일까?

K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고통을 먹고 자란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외국인 친구를 만나게 되면 한 번쯤 나름의 의견을 이렇게 전하곤 한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한국 사회의 모순은 그만큼 압축적이며 훌륭한 드라마의 토양이 된다는 말이다. 최근 열풍을 일으키는 k-드라마, 영화 특유의 자극성은 스크린의 현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한 발 빠져있는 듯한 현실의 질척거림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오징어 게임'이든 'D.P.'이든 '지옥'이든 픽션 속에서도 어딘가 한국사회의 냄새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더 글로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드라마에서 펼쳐지는 자극적인 괴롭힘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학창시절 어딘가의 창고나 옥상을 떠올리게 하며 심심치 않게 폭로되는 직장내 갑질 사건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있을 법한 일이 아닌 우리가 겪어왔고 겪고 있는 정서적 근거가 깊은 사건들이다. 어딘가 인간에 뿌리 박고 있는 것이기에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공감대를 일으킬 수 있었고,  방영 이후 아시아 국가에서 학폭 관련되는 폭로가 이어지는 것은 각자의 맥락에서 그 모순들이 풀어헤쳐 나오는 과정으로 보였다. 

   

이 드라마의 영리함은 피해자 캐릭터 동은을 극적 장치를 통해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 일어난 ‘학폭’ 사건에서 구현되지 못한 정의를 주저하지 않고 드라마 속에 실현해 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불편할 법한 상황들을 아주 재빠르고 꼼꼼하게 제거해 주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학교 폭력을 그리는 장면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동은이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상황들을 철저하게 관리해 주고 있다. 시간을 줄이는 대신 학교 폭력을 더 자극적으로 그리거나 사적 응징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간접적인 복수를 택함으로써 동은의 손이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기도 하다. 예솔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가해자를 향한 동은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서사의 톤도 꽤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피해자의 삶은 가해자의 행위에 의해 영원히 규정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가해자에 대한 응징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꼼꼼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미리 짚고 넘어가면 이 모든 배려들은 캐릭터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모범적인 복수


그런데 최근 화제가 된 어느 트윗처럼 ‘더 글로리’의 복수는 매우 모범적이다. 그 트윗의 요지는 ‘한국에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의문은 대중의 열망 위에 서 있는 단단한 드라마에 묘한 균열을 낸다. 모범적인 사적 복수극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동은 스스로 ‘그게 법적으로 벗어나는 건가요?’라고 되묻는 것처럼 복수가 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꽤 모범적인 답처럼 보인다. 또 이상 했던 점은 드라마의 방영 이후 악역들이 받는 스포트라이트이다. 매력적인 악인은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악역이 유독 주목받는 상황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동은은 이상적 피해자로서 보호받으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대신 악역들은 인간의 속성을 마음껏 펼치기 때문이다. 그 악을 위해서 말이다. 연진은 남편이 자신의 과거를 알기 시작하자 남편이 동은 과의 정신적인 불륜이었다며 남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다. 안하무인에 양아치스러운 전재준은 이상하게 핏줄에 대해서는 진심이다. 동은의 모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자식의 곤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별로 돋보이지 않는 동은의 캐릭터는 바로 그 완벽한 피해자라는 이상화 속에 속박된 것이라면 악인들은 그 굴레를 벗어나 완벽하게 인간으로서 악하다. 이 드라마에서의 도덕의 승리라는 것이 이면적인 의미에서 맥 빠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굿판을 통해 활력을 얻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악의 인간성과 사적 응징에 대한 열렬한 열망이 그것이다.

      

대중문화는 뒤틀린 거울이다     


대중문화는 일종의 뒤틀린 거울이다. 대중문화는 우리 사회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현실원리와 대중들의 욕망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글로리’는 국가 권력과 여론의 힘에 기대고 있지만 사적 복수에 대해 열렬히 찬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폭력을 막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기에 판타지로 변형되기에 충분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특이점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드라마는 사소한 점도 설명하고 때때로 동은은 사과한다. 드라마는 재준을 죽이기 위해 그가 소희를 강제로 임신시켰다는 점을 설명하고 동은은 여정에게 자신이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을 사과한다. 그리고 여정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는 완벽한 사이코패스이다. 이 드라마는 마치 이 모든 것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안 되는 것처럼 완벽을 기해두었다. 사실 많은 드라마는 극적 허용 혹은 현실 원칙에 따라 많은 이유들을 생략하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이유 없는 것들도 많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지나침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가 어떤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는 말이다.    

  

 인기 작가로서 김은숙은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본능적으로 대중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가 드라마에서 악인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 사회가 학폭 가해자들을 다루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극 중 그들이 완벽한 악마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그들을 그와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여론 재판에 이은 법적 제재에까지 동은의 자리에 한국사회의 인터넷 여론을 집어넣어도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를테면 음주운전 연예인들을 비난할 때 종종 예비살인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둘은 다른 것이지만 가능의 영역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죄를 조금씩 과장하고 악마화함으로써 더 쉽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드라마 ‘더 글로리’는 여론 재판의 형식을 드라마를 통해 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은이 이상적 피해자가 됨으로써 생명력을 잃는 것처럼 반대급부로 만들어지는 완벽한 악인들 역시 그 악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집단적으로 눈감고 지나가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집단적 태도는 문제적인가?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구석은 정의 구현을 구경하고 있는 관객들이 지나치게 안전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공론과 사회 체계에 대한 불신이 이와 같은 사적 복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판타지가 다시 국가에 기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진정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체계에 대한 불신을 빌미로 스스로가 기어이 정의의 자리에 서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열망이다. 그리고 그 자신들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기어이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어 가볍게 소비하는 그 과정들은 현실에서도 이 드라마에서도 너무나 가볍게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체계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공론장이 무너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이슈와 중립기어와 엑셀만이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열정은 과연 정의로운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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