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관광시스템에 대한 뇌피셜
어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까사 주인아주머니는 내일 떠난다는 말에 또 실망을 하셨다 벌써 세 번째 말씀드린 것이었는데 세 번 모두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문제는 우리가 떠나는 것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말을 해야 했다.
우리는 멕시코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하바나로 가야만 한다
국외로 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실망을 낮춰줄 수 있을까? 그녀는 내일 조식이 없다고 했다. 황당했다. 처음부터 염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동안 멍해서 l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떤 계약서도 영수증도 없는 쿠바에서 외국인은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물었다. porque? 왜라고 물었다.
어제도 아침, 그제도 아침. 왜?
그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말을 바꾸며 내일 아침은 8시에 또르띠야를 준다고 했다.(계란 부침 그런 건데) 방에 들어왔는데 기분이 여전히 찝찝했다. 밥을 주지 않는다니 허참. 밥에 가격을 더 붙일지, 3일 치 밥에 가격을 붙일지 혹은 하루 숙박비를 같은 가격으로 받지 않을지 어떤 일이든 열려있었다. 마지막에 물러선 정황상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지만 기분은 찝찝했다. 나는 그런 불확실성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고 최악의 경우를 잘 상상하는 편이다.
아침에 비가 많이 왔고, 아주머니는 조식을 잘 챙겨 주었다. 살짝 웃기도 했다. 같은 메뉴에 케익이 3조각이 있었다. 어머니의 생일인지 알았는데, 어머니의 날이라고 하며, 몇 월엔 아이들의 날, 언제는 어머니의 날 이런 얘기를 했다. 한국에도 그런 날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드디어 우리를 놓아주신 모양이었다. 빵이 아주 심하게 달았다. 마치 아주머니의 조절되지 않은 아이 같은 욕망처럼 말이다.
조식을 먹고 l은 잠시 쉬었다. 12시에, 아니 12시 1분에 택시가 집 앞으로 온다고 했기에 여유가 있었지만 9시 40분쯤 되자 신경이 쓰였다. 카데카(환전소)가 언제 여는 지는 알았지만 생각해보니 월요일이라 줄을 많이 서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고 일찍 (8:30) 시작해서 점심시간이 빠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카데카를 향했다. 다행히 환율은 어제보다 훨씬 좋았고 줄을 서지 않아도 가능했다. 나는 또박또박 100유로를 cuc로 바꾸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돈을 주었다. 나는 계속 그를 쳐다보았고 동전까지 세었다. 그 순간 그가 나에게 1cuc짜리 동전을 하나 더 주었다. 정확히 계산이 맞았다. 아마 꽤 높은 확률로 그가 나를 속일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받았으면 되었다.
20여분 뒤에 l이 환전소로 왔고 그 얘기를 해 주었다. 나는 현지 물가로 파는 식료품 및 잡화점을 보았고 정가가 정해져 있었고 예상대로 상당히 쌌다. l은 오는 길이 좋다고 예쁘다고 해서 거리를 걸었는데, 거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예상은 했었는데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와서야 이 거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첫날은 l이 아팠고 다음날들은 해변에 다녀오기에 바빴다. 오밀조밀하게 오르내리는 적절한 지형과 직선적이지 않은 골목골목 쿠바 어디에서나 그렇겠지만 뜬금없이 나타나는 부서진 집들과 고치다 만 집들, 오래된 돌로 이루어진 도로들이 너무나 조화로웠다. 밤마다 깨어진 병들로 돌들 사이가 반짝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길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쿠바인들은 그 거리들을 치우는 것 같았다. 첫날 하바나에서 묵었던 호르헤 씨의 집 근처 빈민가에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리의 쓰레기들은 치워져 있었다.
특히 역사박물관 탑 위에서 바라본 트리니다드의 풍경은 마치 크로아티아의 드보르닉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 300년 낡아 닳아버린. 정열적인 크로아티아의 주황색 천장과 비슷한 지붕들이었지만 부서지고 낡고 구불구불 오르막내리막 하는 길들과 저 멀리 앙꽁해변 그리고 산들은 훌륭한 풍경이라 아니 말할 수 없었다.
11:40분 쯤에 까사에 다시 들어갔다. l은 더 늦게 들어가면 아주머니가 더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친구분과 얘기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있을 때 하루치 추가 숙박비를 계산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계산했다. 아무래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명함도 받아 들고 숙소 사진도 몇 방 찍었다.
무사히 모든 것이 끝났나 했는데 택시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12시에 온다는 택시가 12:30분이 되어도 오지 않았고 마음에서 우리를 지운 아주머니는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de casa a casa라고 얘기했는데도 여기가 아니라 저 길가로 나가야 한다고. 30분을 기다리다 이건 아니다 싶어 비아술 터미널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 어제 터미널에서 만났던 호객하시는 분을 다시 만났고, 잠시뒤면 택시가 떠난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같은 25cuc. 그는 짧은 영어를 했다. 나중에 보니 아주 짧은 영어였는데 영어 그 자체가 뭔가 편안함을 주었다. 한국말로 말을 거는 사람을 쉽게 믿어버릴 것 같은 경계심이 들었다. 어느 음식점 앞에서 다른 손님 2명을 찾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7분이면 된다고 했던 다른 승객은 20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비아술 버스가 2시였기에 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안이 없어지면 협상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런데 비아술 버스는 7시간이나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비가 내렸고 l이 거리에 있는 추로스 비슷한 것을 사 먹으려 가격을 물었는데 1cuc라고 했다. 솔직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현지 물가를 보거나 다른 사람이 내는 돈을 보아도 그렇다. 어제 동내를 돌아다니며 파는 거대한 빵도 1cuc였다. 배가 고팠고 빵이 거대해 살만한 돈이었지만 그랬다. 어제 닭고기 맛이 나는 돼지고기 햄버거도 그 전날 50센트에 먹었던 것이 1cuc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 나는 그 상인에게 어제 50이었는데 왜 그러냐고 따지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1cuc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l은 가격을 묻기가 싫어졌다고 했다. 어차피 1cuc고 해변이고 자릿세는 2cuc다.
그 호객꾼은 우리에게 cien fuegos를 가는 다른 택시를 권했다. 4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그곳에서 호객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택시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기사는 보여달라고 하자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깨끗이 포기하고 비아술이 떠나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짐은 무거웠다. 좋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누구지? l이 개인환전하시던 분이라고 했다. 아! 어제 그제 주말이라 환전소가 닫혀 있었는데 그때 그 옆에서 100유로를 100cuc로 바꾸자고 하던 분이었다. 100달러는 88cuc(달러는 10% 페널티가 있다는 것은 풍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쿠바에는 유로나 캐나다 달러를 들고 간다) 대략 104-105 언저리의 환율이었는데 주말이니 100이라고 했었다.
나는 내일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문제일 뿐이다. 103?
아니.
그는 기분 나쁜 표정이나 압박도 없었다. 그가 주말 환전소 옆 자리에 있기에 가능한 거래였고, 정말 쿨한 흥정이었다. 마치 쿠바의 관광산업 같았다. 그걸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 토요일 일요일 두 번 마주치다 보니 밝게 인사해 주었고 우리도 같이 인사했다. 왠지 기분이 상쾌했다.
다시 짐을 짊어지고 l은 땀까지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헐래 벌떡 어제의 그 할아버지가 뛰어왔다. 어디 있었냐고? 아마 숙소 아주머니로부터 이쪽 방향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뛰어온 모양이다. 나는 30분이나 기다렸다고 인상을 구겼다. 그는 casa to casa라고 얘기했다. 나는 잔뜩 얼굴을 구기고 그가 적어준 종이를 보여주었다. 그는 12 01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며 12 o 01이라고 했다. (o는 or을 의미한다) 그럴 듯도 했다. 하지만 어제 12시가 아니라 12:01분이라 웃었던 기억도 있었다. 미누토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황을 살펴보니 양쪽 다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도대체 뭐냐는 표정을 여러 번 지었다. 아저씨는 헐래 벌떡 여기저기 전화를 빌려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짓기로 했다. 사람들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웃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해 두자. 어제 오늘은 유독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헐떡거리는 그를 보며 들고 있던 큰 물병의 차가운 커피를 권했다. 뭐냐고 물어서
물 많이 커피 조금
몇 번의 이동 끝에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택시는 쿠바 치고는 훌륭한(28만키로 정도 달린 기아 rio) 퍼블릭 택시였고 에어컨 작동도 잘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승객이 문을 열어두는 바람에 에어컨은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속 100킬로를 넘게 달렸는데 열풍이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좀 없어 처음으로 더위를 먹을 뻔했다. 택시기사는 선망의 직업답게 긴 셔츠에 드물게 삼성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영업도 외주를 주었으니 쿨했고 나중에는 꽤나 샤이하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다.
다시 아바나에 들어와 길을 걷다 발견한 발코니가 있는 까사를 괜찮은 가격에 3일 묶기로 했다. 발코니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쿠바가 조금 이상했다. 이상한 점은 단지 외국인에 대해 이중물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를 훔쳐보거나 도둑질을 할 것이다.(그래서 투명인간이 되었는데 눈이 보이지 않고, 순간이동을 하는데 물건을 들고 갈 수 없는 설정의 일본만화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특별한 능력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을 제거해 버린 능력 그 자체라니) 아마 우리나라 택시 기사들이나 관광업 종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혹은 심한 시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정보의 불균형과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은 사회적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은 대부분의 나라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쿠바는 모네다와 세우세라는 마법의 방패가 있지 않은가?
이상한 것은 그들이 심한 장사꾼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상당히 건실한 사람들로 보였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쿠바의 치안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신사적이었다. 무너져가는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절박한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배급체계가 적당히 굴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공공 물가 역시도 버스값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당히 낮기 때문일 것이다. 쿠바의 의료체계는 기술 향상은 모르겠지만 의료인 수가 국민수 대비 상당하다고 들었다. ) 그리고 관광지에서 걷어가는 자릿세 비슷한 것도 국가에서 단속을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이중가격으로 불러버리는 것이 사회 전체의 담합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호르헤가 우리를 위해 잡아준 콜렉티보가 그 담합을 깨는 자본주의적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는 에어비엔비를 통해 좋은 평을 얻기를 원했고, 그의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쿨함과(조식을 원하지 않아도 그는 우리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는 평판이 중요하다는 것을 트리니다드 숙소 아주머니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친절은 어떤 정에서 오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서비스 정신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안정적인 인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콜렉티보는 누구나 이용하는 어떤 것이었고 현지 가격보다는 두 배정도 지불하기도 했다.(카피톨리오에서 베다도 23-26 스트릿까지 인당 1세우세를 지불했다. 다른 사람들은 10모네다 지불)
어찌 보면 재미있는 방식의 국가적, 사회적 담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직관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산주의적 배급으로 인해 현지물가가 기본적으로 아주 낮기 때문에 그것을 관광객이 그대로 누리는 것은 관광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cuc와 casa 비아술 등의 관리를 기본으로 관광물가를 새롭게 형성할 필요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쿠바가 관광사업을 시작한 것도 미국이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본격화한 시기 이후라고 한다. 그래서 쿠바를 입국할 때에는 미국 입국에 방해가 되지 않게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고 입국 확인증 같은 것을 주었다. 쿠바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체게바라와 사회주의 국가라는 고유성으로 인해 관광을 원하는 사람은 충분했을 것이다. 관광사업은 그런 측면에서 완전히 자본주의적 방식이기보다는 외국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을 요구하는 지대추구 방식의 모습을 띄기도 한 것 같다. 어찌 보면 강제된 공정여행이라고 할까. 정직한 사람들이 속인다는 감각을 극복하는 방법은 내부와 외부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24시간 열었던 스낵바에서 이상한 계산방법에 더해 거스름을 적게 주어 우리가 추가로 돈을 요구하자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면서 어색하게 0.3 cuc를 더 주었을 때의 분위기도 내게는 그러해 보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방식은 관광산업 진흥에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체제가 다른 두 사회의 물가차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트리니다드 숙소 아주머니가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지물가와 엄청난 차이가 나는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의사와 같은 공공일자리의 임금과 자영업의 임금차가 굉장히 차이가 나고 그것이 빈부격차의 원천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백인과 기타 인종 간의 격차도 송금수익과 자영업 진출 비율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