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는 날이 장날 #3

브뤼셀 거리 놀이공원

by 기타치는 사진가

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쉬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난다. 혜나도 피곤한 기색은 없다.


“혜나야, 이제 어디로 가볼까?”

“아까는 저 쪽으로 가서 그랑플라스를 구경했으니 이번에는 이 쪽 큰길 따라가 봐요.”

“뭐 정해 놓은 볼거리는 없는 거니?”

“이런 도시는 그 자체가 볼거리 아닌가? 그냥 걸어 다니는 게 재밌잖아.”


거참, 이 녀석 참 대책 없다. 브뤼셀까지 와서 그냥 걷자니. 여행을 떠나기 전 브뤼셀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몇 년 간 근무한 적이 있는 친구에게 어디를 보면 좋을지를 물어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잔뜩 해 주었지만 혜나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스스로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패키지를 구매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가며 다니는 여행도 있고, 우리처럼 정해 놓은 것 없이 다니는 자유여행도 있다. 혜나는 브뤼셀 여행의 목표를 초콜릿으로 정한 모양이다. 이미 그랑플라스의 골목을 다니면서 충분히 초콜릿은 구경했고, 이제부터는 덤으로 얻어가는 여행인 셈.


나도 여행에서 많은 것을 준비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머지는 우연에 맡긴다. 짧은 시간에 좀 더 많은 포인트들을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행은 게임 속의 퀘스트가 아니다. 빠르게 움직이며 아이템을 획득하고 사냥 다니듯 사진을 찍는 게임으로 여행을 생각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이다. 역사적, 문화적 명소를 찾아 실제의 모습을 경험해 보는 것이 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그만큼이나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곳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의 호흡으로, 그들의 리듬으로 살아 보는 것, 그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 보는 것, 그러다 보면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이 평소와는 다른 세상이 보이고, 다른 삶이 보인다. 어쩌면 내가 살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내 삶 속에 슬며시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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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걸어 보자는 혜나를 따라 해가 기울고 있는 서쪽으로 향한다. 브뤼셀은 북위 50도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은 북위 37도이고 백두산이 북위 42도이니 우리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여름 낮시간이 무척 길다. 서울 같으면 4시가 넘으면 뉘엿해질 시간이지만 여기는 아직 중천이다. 오늘 브뤼셀의 해지는 시각은 오후 8시 50분이다. 해지고도 한 시간 정도 여명을 고려하면 10시가 되어야 밤이다. 참고로 같은 날 서울의 일몰 시각은 저녁 7시 17분이었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낮이 기다니. 여행하기 정말 좋은 조건이다.


거리 양쪽으로 햇살이 가득 퍼져있고, 그 햇살 속에서 사람들은 커피와 맥주를 즐긴다. 저녁 식사로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식탁 가득 요리를 쌓아 놓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이 도시에 가득하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저 안으로 걸어 들어가 감자튀김을 쌓아놓고 벨기에 맥주나 들이켜면 좋겠다 싶지만 술을 못 마시는 데다 맥주 알레르기가 있는 혜나는 맥주 따위는 아예 관심이 없다. 벨기에가 얼마나 맥주로 유명한 나라인데... 역시 맥주 파티는 기약 없는 다음 여행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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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의 오후 풍경 속에서 두 블록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철 구조물이 보인다.


“혜나야, 저게 뭘까? 크레인 같지는 않은데...”

“글쎄요… 정말 희한하게 생겼네…”


가까이 다가가니 구조물은 다름 아닌 놀이기구. 기다란 쇠기둥 끝에 벤치를 매달고 뱅글뱅글 돌리는, 놀이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놀이기구가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높이 올라간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고, 거리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재미있어한다. 낯선 광경에 잠시 멈추어 같이 구경을 한다. 이게 뭔 일 이래...


“곤니찌와~~, 곤니찌와~~”


이상한 울림의 외침이 들린다. 돌아보니 우리 뒤편으로 지름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확성기 나팔이 있고, 외국인 남녀가 확성기에 대고 뭐라 소리치고 있다. 혜나와 나를 보고는 일본말로 인사를 하는 모양이다. 손을 흔들어 주고는 길을 건넌다. 길 건너 언덕 위쪽으로 길게 놀이기구와 푸드트럭들이 늘어서 있다. 그 앞에는 인산인해. 브뤼셀 사람들이 죄다 나와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조금 전 그랑플라스 쪽에도 사람들로 가득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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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플라스를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이라고 치자면 대략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부터 탑골공원까지를 온통 막아놓고 놀이기구를 설치한 셈이다. 어지간해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규모로 말이다. 놀이기구들을 따라 걷다 보니 놀이공원이 통째로 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상현실 체험장, 회전목마, 범퍼카 등의 놀이기구들이 차례로 나타나고, 그 사이사이로 와플, 피자, 각종 구이류 등을 파는 푸드트럭들이 진을 치고 있다. 원래 거리를 차지하고 있던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맥주와 와인,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도심 2Km 남짓한 거리가 온통 축제의 현장이다.


“우리 이 중에서 하나는 타고 가야지?”

“그러게요, 뭘 타볼까?”

“관람차 어때? 저건 재밌게 생겼는 걸. 유리창이 없어. 그냥 뻥 뚫려 있어.”

“음… 그러자!”


우리는 관람차를 타기로 하고 줄을 섰다. 요코하마에 있는 대관람차 정도의 크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높이 올라간다. 관람차에는 창이 없고 커피잔처럼 생긴 바닥에 의자만 매달려 있다. 고소공포증이 심한 아내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으리라. 10여 분 기다리니 우리 차례. 한 칸에 우리 둘만 탄다. 밑에서 보던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 같다. 브뤼셀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시내 중심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밑으로 대리석 건물들이 그랑플라스까지 이어지고, 그 너머로는 야트막한 주택가가 눈 닿는 곳까지 펼쳐져 있다. 위에서 보니 브뤼셀도 엄청나게 큰 도시이다.



“혜나야, 이런 거 있는 줄 알고 온 거니?”

“그럴 리가…”


생각해 보니 호텔까지 복잡하고 어지러운 여정을 거쳐야 했던 이유 중에 이 놀이 공원 때문에 도로가 차단된 탓도 있었다. 저쪽으로 아까 막혀서 돌아갔던 길이 보인다. 역사나 문화적 전통이 있는 축제도 아니고, 그냥 먹고 노는 이런 놀이판이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주변의 시민들 중에는 불편해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텐데. 다음날 아침 놀이기구는 언제 시끌벅적하게 돌아간 적이 있었냐 싶게 분해되어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이 역시 가는 날이 장날, 혜나의 여행은 매일이 장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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