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브뤼셀의 심장, 그랑플라스

8월 19일, 그랑플라스

by 기타치는 사진가

오줌싸개 동상을 뒤로하고 혜나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자기가 가자고 했던 도시에 왔으니 이제부터는 혜나가 앞장설 차례이다.


“혜나야, 이제 어디로 가니?”

“그랑플라스.”

“가는 길은 알아?”

“몰라. 그냥 사람들 많은 데로 찾아가면 된대.”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도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 나서는 낯선 도시라니. 하지만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행진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좁은 골목은 와플 가게와 초콜릿 가게들로 이어진다. 촛불시위 때처럼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조금 걷다 보니 이내 광장이 나온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벽돌을 깔아놓은 전형적인 유럽식 광장이다.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광장 주변으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고, 그 바깥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다. 광장에 들어서 보니 중앙으로 엄청나게 커다란 꽃밭이 만들어져 있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광장의 거의 2/3 정도를 꽃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형형색색으로 화려함의 극치이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중세 고딕 건물들과 어울려 마치 ‘유럽의 화려함은 이런 것’ 임을 과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광장은 시민의 것이다. 비좁은 유럽의 도시에서 광장은 시민들을 위한 다목적 공간이다. 이 곳에서 장도 열려야 하고, 버스킹도 해야 한다. 정치가 엇나간다면 시위도 해야 한다. 그들이 이민자이거나 성소수자이거나 상관없이 차별당하고 억울한 것이 있는 사람들은 광장에서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랑플라스 광장의 화려한 꽃밭을 보며 대학 시절의 도서관 앞 광장이 떠올랐다. 당시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던 도서관과 대학 본관 사이 광장은 한마디로 시위하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하고, 교문까지 행진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86년, 몇 년 전까지 그곳에는 장미가 심어져 있었다고 했다. 82년 민주화 시위가 두려웠던 정권은 대학 본부를 앞세워 광장을 장미 가시로 덮었다. 84년 성난 학생들에 의해 뽑혀나갈 때까지 광장의 장미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덮고 있는 장막이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에는 장미 대신 헬멧을 쓴 사복 경찰들이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아크로폴리스의 장미에 대한 기억은 그랑플라스의 꽃밭에 대해서도 염려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런 염려는 기우였다. 다음날이 되니 광장은 언제 그런 꽃밭이 있었냐는 듯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 광장 위에는 관광객들이 활보하고 있었고, 버스킹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 #2]

뒤늦게 검색해 보니 그랑플라스의 꽃밭은 플라워카펫이라는 이름으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벤트이다. 백만 송이의 베고니아로 이루어진 꽃밭은 12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4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 낸다. 올해의 경우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단 4일간 열린 행사였다. 이 정도라면 광장의 기능을 해칠 일은 없다. 광장은 살아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억세게 운이 좋은 거다. 해마다 하는 것도 아니고 2년에 한 번, 그것도 나흘에 불과한 장관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그랑플라스의 플라워카펫을 한참 구경하다 보니 허기가 진다. 골목길 안쪽에서 할머니의 레시피로 만든다는 미트볼 집을 찾았다. 주먹만 한 미트볼과 감자로 가볍지만 맛있게 점심을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그랑플라스 구경을 나섰다. 한 집 건너 와플집이고, 그 옆집은 초콜릿 가게. 골목은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한 블록 옆으로 옮기니 아케이드가 나온다. 생튀베르 갤러리로 유럽의 3대 갤러리라는 곳. 두 개의 아케이드 건물이 각각 100미터 정도씩 이어진다. 양 옆으로 시장통처럼 가게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폭 10미터 정도 되는 통로는 차를 마시는 야외테이블로 비좁다. 입구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상점가로 발을 들여놓고 보니 4-5층 정도 높이의 천장은 유리로 되어 있고 그 너머로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베네치아 호텔의 인공하늘이 떠오른다. 좌우로는 명품샵, 기념품 가게, 초콜릿 가게들이 화려하게 쇼윈도를 꾸며놓고 있다.



진열되어 있는 초콜릿들은 하나같이 예쁘다. 모양이며, 색이며, 진열해 놓은 방식까지 세련되고 화려하다. 중세시대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왔던 브뤼셀인 만큼 소비자를 유혹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어떤 초콜릿 가게는 세탁기만 한 건물 모형을 초콜릿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기도 하고, 어떤 가게는 렌치, 스패너, 볼트, 너트, 가위 등 녹슨 공구 모양으로 초콜릿을 만들어 팔고 있다. 심지어 아이폰 모양의 초콜릿까지. 신용카드를 꺼내고 싶은 유혹을 어렵사리 억누른다. 혜나는 아스테릭스 주인공 세트를 판매하는 초콜릿 가게 앞에서 완전히 멈춰 서 버렸다.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 이데픽스까지 어찌나 책과 똑같이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사실 아스테릭스는 프랑스 사람들이 열광하는 프랑스 만화이다. 주로 골족이 로마 점령군을 골탕 먹이는 이야기이고, 우리 아이들도 거의 모든 줄거리를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좋아하는 만화다. 아스테릭스 시리즈에서 벨기에는 ‘아스테릭스, 벨기에에 가다’ 편에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어쩌면 프랑스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일 수도 있겠다. 조금이라도 연결고리를 이용하여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상술을 보면 역시 유럽 최고의 상업도시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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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브뤼셀 떠나기 전에 쇼핑할 시간 있겠지?”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

“그럼 초콜릿은 그때 사면되겠네. 근데 여태껏 아빠가 본 초콜릿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그러게... 완전히 딴 세상이네...”


초콜릿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부녀의 아이쇼핑은 호텔 체크인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결국 길거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으며 발길을 돌렸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멀찌감치 세워 두었던 차를 가져다 호텔 주차장에 넣어두고 나오니 4시가 훌쩍 넘었다. 짐을 대충 풀어놓고 다시 호텔을 나섰다. 이번엔 어느 쪽으로 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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