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브뤼셀
“아빠, 포르투갈에 여행 가자.”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혜나가 조른다. 아닌 밤중에 왠 포르투갈? 이 녀석이 포르투갈에 대해 언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와 포르투갈은 연결되는 게 없다.
“그래, 가자. 근데 갑자기 포르투갈은 웬일이니?”
“빵 먹으러 가야 해.”
빵 먹으러 ‘가자’도 아니고, ‘가야 해’라니.
“근데 왜 빵 먹으러 포르투갈에 가야 하는 거야?”
“아빠는 그것도 몰라? 빵이 포르투갈 말이잖아. 그러니까 포르투갈 빵이 제일 맛날 거 아니야.”
군산 이성당도 아니고 대전 성심당도 아니고 빵의 원조를 찾아 포르투갈에 가야 한다는 혜나의 집념은 이후 한참 동안 이어졌다. 나는 잊을 만하면 포르투갈에 가야 한다는 혜나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고, 혜나가 포르투갈이라는 곳이 가볍게 훌쩍 떠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현실을 깨닫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혜나는 포르투갈은 잠시 접어두고 자기가 직접 빵과 과자를 만드는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에 돌입했다. 열심히 빵과 과자를 구워대던 혜나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는지 파티시에 취미는 접고 미식가로 돌아선다. 어쩌다 해외 출장을 가게 되면 혜나의 선물은 늘 초콜릿이었다. 일본에 매달 두어 번씩 드나들 때에도 갈 때마다 ‘올 때 맛있는 초콜릿’에 대한 당부가 빠진 적은 거의 없다. 그러던 혜나가 브뤼셀에 가까워지고 있다.
브뤼셀 외곽이다 싶은데 내비게이션은 터널로 안내한다. 유럽의 도심 터널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터널 중간에 다른 터널과 합류하기도 하고, 터널이 좌우로 나뉘며 갈림길이 나오기도 한다. 점선으로 그려진 차선인 경우 터널 내부라도 차선 변경이 가능하다. 위성 정보를 수신할 수 없으니 내비게이션을 100% 신뢰할 수도 없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터널을 벗어나니 바로 브뤼셀 도심이다. 도심 주변의 오래된 주택가를 뚫고 도로를 확장할 수 없으니 터널을 뚫어 버린 모양이다.
훅하니 다가온 브뤼셀 도심은 당황스럽다. 10분 전 까지만 해도 소와 말이 풀을 뜯는 초원 사이로 시속 100Km로 달리고 있었는데 터널을 지나고 나니 거대한 빌딩이 하늘을 가리고 있고, 거리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건물은 현대식 건물과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들이 뒤섞여 있다.
“꺄악~~! 이게 유럽이지. 신난다! 드디어 브뤼셀에 왔다.”
난데없이 옆에서 졸고 있던 혜나가 환호성을 지른다.
“그렇게 좋아? 프랑크푸르트랑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사람들이 훨씬 많잖아. 건물들도 멋있고. 프랑크푸르트는 졸렸어.”
하긴 일요일의 유럽 도시에서 활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관광지와는 거리가 있는 주택가와 변두리 도심만 지나왔으니 심심할 만도 했겠다. 프랑크푸르트와는 달리 브뤼셀은 일요일에도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다.
호텔까지의 거리는 이제 몇 Km 이내로 줄어들었다. 가는 길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신호등과 공사장을 조심스레 피해 가며 호텔을 찾아간다. 브뤼셀은 언덕이 많다. 샌프란시스코나 나가사키처럼 급경사의 언덕은 아니지만 높은 곳은 제법 경치가 좋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 도시 구경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지는 않는다. 호텔을 찾는 미션과 체크인이라는 미션을 완수해야 도시 구경을 득템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 집 게임의 여왕 혜나 역시 게임의 법칙을 몸으로 파악하고 있다. 함께 내비게이션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길안내에 열심이다.
“여기서 우회전하는 거 맞지?”
“응, 맞아요. 50미터 더 가면 좌회전이야.”
좌회전만 하면 호텔이다. 이제 다 왔다. 바로 저기가 좌회전 포인트인데 꽃이 보인다. 어라?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화분이라니. 어쩐 일인지 도로를 막아 놨다. 한 블록 더 가서 좌회전을 하기로 했다. 20미터 앞에 다음 교차로가 있다.
“아빠, 여긴 좌회전 금지. 일방통행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직진은 아예 안되고 우회전만 가능한 일방통행길. 내비게이션은 여전히 아까의 그 막힌 길로 안내를 하고 있다. 1차 시도 실패. 조금 크게 돌아보기로 했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면 다른 길을 알려주겠지. 서너 블락을 지나 기찻길도 지났다. 내비게이션 안내 경로가 바뀐 것 같다. 호텔 20미터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엔 호텔이 건너편에 있다. 호텔 간판은 보았으니 반쯤 성공한 셈. 다시 선회를 시도했지만 일방통행과 공사 중이라는 장애물로 인해 도저히 접근이 어렵다.
“아빠, 차라리 근처에 차 세우고 걸어가자. 걸으면서 차가 갈 수 있는 경로를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오케이. 좋은 생각이다. 역시 게임의 여왕인걸.”
“아싸, 저기 차 하나 나가네.”
오징어 먹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하던 머릿속이 혜나의 참신한 제안에 순식간에 맑아진다. 마침 길 한편으로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차들 중 한 대가 내 앞에서 빠져나간다. 호텔과의 거리는 100미터 정도. 바로 주차했다. 노상 주차장인 듯하다. 주차 스탬프 발급기 같은 장치가 주변에 있는데 스탬프를 내걸고 있는 차는 한 대도 없다. 분명히 주차요금을 받을 텐데 어떻게 내야 하나 고민을 하다 마침 내차 뒤로 주차를 한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내뱉은 말 중에서 주차요금 parking fee이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는지, 청년은 프랑스어로 중얼중얼거리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준다. 구글 번역기에는 ‘일요일은 주차요금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메르시 보꾸, 오봐(감사합니다. 안녕)”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했다. 내가 아는 프랑스어 전부 동원됐다. 상대방 청년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한시름 놨다. 호텔까지 걸어가는 길은 간단했다. 이런 길을 차로는 그렇게 헤맸다니. 역시 유럽의 도시는 만만치 않다. 호텔 프런트에서는 3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단다. 지금은 1시 30분. 큰 짐들은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두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부터 먹어야겠다.
호텔을 나와 무조건 사람 많이 다니는 길로 나섰다. 아까 막혀있던 골목길로 사람들이 이어진다. 한 블록 지나니 사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 유명한 오줌싸개 동상이다. 오줌싸개 동상은 생각보다 작아서 실망한다는 이야기로 오히려 유명하다. 역시나 내 팔꿈치에서 손끝 정도의 크기로 앙증맞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더더욱 작아 보인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유쾌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 #1]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인 모양이다. 옷을 걸치고 있다. 브뤼셀에 외국 정상이 방문하거나 국제적인 행사가 있는 경우 해당 국가에서 옷을 선물하기도 한단다. 선물 받은 옷은 잠시 걸치고 있다가 박물관에서 보관을 한다고 한다. 오늘은 금빛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있다. 아랫도리는 치마 비슷한 걸 걸치고 있는데, 옷을 입고 있더라도 오줌은 계속 누어야 하니 허벅지에 엉거주춤 걸쳐 놓은 모양새다. 영 본새가 살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늘 옷을 입혀 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돌아와서 보니 한복을 입은 사진도 있다. 감청색 도포를 멋지게 입고 오줌을 싸는 모양새라니...
오줌싸개 동상이 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더란 것은 다음날 바로 확인한 사실이다. 어제와 똑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셀카를 찍고 있었지만 동상은 옷을 벗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어제가 장날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