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프랑크푸르트-> 브뤼셀
유럽에서 이틀째 아침, 시차 때문인지 다들 새벽에 깼다. 일찌감치 준비하고 내려간 식당에는 이미 두어 명의 손님이 식사 중이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Guten Morgen?” 고등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는 인사말만 화석처럼 남아 있다. 그나마 먼지 털어 써먹어 본다.
호텔 식당은 치즈와 햄 각 네댓 가지, 크라상, 식빵을 비롯한 각종 빵들, 시리얼, 오믈렛, 과일 등 푸짐하게 한 상 차려져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음식의 향연에 잠시 정신을 잃었나 보다. 자리를 찾아 앉고 보니 내 접시는 치즈와 햄이 종류 별로 가득하다. 아이들의 접시도 비슷하다. 오랜만에 아침부터 과식을 해 본다. 유럽의 첫 아침을 맞는 아이들을 보니 96년 아내와 처음 겪었던 루체른의 호텔이 떠오른다.
전날 취리히에 도착한 후 우여곡절 끝에 루체른에 숙소를 잡고 하룻밤을 무사히 보냈다. 오늘과 비슷하게 일찌감치 눈을 뜬 아내와 나는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넓지 않은 식당에는 코 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아저씨와 노인 부부가 각각 테이블을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고, 아내와 나는 코 수염 아저씨 맞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먹어 보는 정통 소시지와 치즈 맛에 감탄하며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코털 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좋은 아침! 일본 사람인가요?”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한국인은 흔치 않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냐며 말을 걸어온다. ‘곤니치와’하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많았다.
“고마워요. 우린 한국에서 왔어요.”
“아하~ 한국 사람이군요. 반가워요. 전 독일에서 왔어요.”
혼자 밥 먹는 아저씨가 안쓰러워 우리 테이블로 합석을 권했다. 독일 어딘지는 기억에 없지만 기차를 타고 루체른에 왔고, 출장을 왔지만 일은 내일 보면 되고, 알프스가 보고 싶어 하루 먼저 왔단다. 그러면서 우리의 일정을 묻는다. 딱히 계획이란 게 없었고, 아침 먹고 방에 돌아가 여행 정보 책자를 뒤져볼 생각이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 아저씨와 함께 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 날 아저씨가 우리를 이끌고 간 곳이 엥겔베르크였다. 엥겔베르크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 잠시 미뤄두고…
“햄이랑 소시지랑 치즈가 진짜 맛있어요. 아무래도 너무 먹은 것 같아.”
“나도 그래. 역시 독일 소시지는 맛있어.”
“옆 테이블에 독일 아저씨들은 우리 두 배는 먹는 것 같던데…”
다시 방으로 돌아와, 짐을 꾸려 호텔을 나서니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무지근하게 살갗을 눌러오는 한국의 아침 더위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도 더위에 시달릴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해진다. 그럴수록 제대로 구경하고 즐기고 가야지. 이제 본격적인 유럽 여행 시작이다. 혜진이는 프랑크푸르트 남역에서 9시 30분 기차로 베를린으로 떠난다. 나와 혜나는 브뤼셀로 간다. 3일 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만난다. 오늘 머문 호텔이 마음에 들어 화요일도 여기서 머물기로 하고 예약을 해 두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일요일 아침의 한가함 속에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차선 하나를 온전히 자전거 도로로 마련해 놓은 거리가 부럽고, 그 위를 경쾌하게 내달리는 자전거들이 부럽다. 도심에선 자동차나 자전거나 별 차이가 없다. 어차피 신호등에서 만나게 되니까. 내비게이션이 공사로 막힌 길을 알려주는 바람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9시를 몇 분 앞두고 프랑크푸르트 남역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이 서울역이라면 남역은 서부역, 혹은 영등포역의 분위기. 중앙역에 비해 많이 작고 초라하다. 역 광장에는 어디나 그렇듯 노숙자들이 몇 명 보이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여행자도 몇 명 보인다. 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는 역 광장의 비둘기도 어디든 비슷하다. 혼자 베를린으로 떠나는 혜진은 긴장한 탓인지, 설렘 탓인지 조금 상기되어 있다.
흔한 여행의 모습은 아니다. 일행이 나뉘어 따로 돌아다니는 것, 그러고는 다시 만나 함께 다니는 것. 과감하다, 혹은 무모하다... 여러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함께 두루 돌아다니면서 여러 도시들을 경험하는 것이 좋겠지만 주어진 시간은 7일뿐이다. 혼자 하는 여행도 나름대로의 재미와 멋이 있다. 어찌 되었건 혜진이와 혜나의 관심사가 워낙 다른 상황에서 최적의 선택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혜진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광주 비엔날레에 혼자 가 있다. 취향이 딱 들어맞는 동행이 아니라면 차라리 혼자 떠나는 여행이 훨씬 나을 수 있다. 타인의 취향이나 입맛을 염두에 둘 필요 없이 오롯이 내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오죽 친구가 없으면 혼자 다닌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즐기는 것의 재미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영화든 여행이든 혼자 다녀 보면 그동안 내 옆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경 쓰고 살았는지를 알게 된다. 처음에는 조금 허전할 수도 있지만 신경 써야 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지는 금방 느낄 수 있다. 하다못해 혼자 보는 영화가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개찰구가 따로 없는 덕에 플랫폼까지 함께 올라간다. 기차가 오려면 20분 정도 남았다. 기차 타고 떠나는 모습까지 보려 했지만 시간 아까운데 먼저 떠나란다. 브뤼셀까지 한참 가야 하지 않느냐며. 하이파이브로 혜진이와 헤어지고 혜나와 나는 브뤼셀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을 세팅하고 1단 기어를 넣고 출발~~ 이젠 더 이상 덜컹거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