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프랑크푸르트
첫날 머물 숙소는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잡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체크인을 하게 될 테고, 저녁 먹고 나면 피곤해서 쉬고 싶어 질 거고, 다음날 아침부터 혜진이는 베를린으로, 혜나와 나는 브뤼셀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좁고 복잡한 프랑크푸르트 도심을 헤매고 다니기보다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교외의 호텔이 나았다.
공항을 나오니 이내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하늘에서 보았던 많은 숲 중의 하나일 테지. 아쉽게도 숲은 이내 주택가로 이어지고 마인강을 따라 고속도로를 달린다. 15분? 20분쯤 달렸을까? 어렵지 않게 호텔을 찾아 주차했다. 조용한 시 외곽 주택가에 자리 잡은 호텔이다. 건물도 깔끔한 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다. 역시나 객실이 깨끗하고 새 것의 냄새가 아직 남아 있다.
유럽에서는 2-300년 된 호텔에 묵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오래된 호텔이라도 비싸고 고급이면 괜찮겠지만 가난한 여행자들이 묵게 되는 호텔들은 에어컨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더운물이 제대로 안 나오거나 변기 물이 제대로 안 내려가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래된 건물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고풍스러운 외관에 감탄하기엔 현실의 불편이 너무 크다. 96년 리옹에서 머물렀던 호텔이 그랬다. 사방으로 방이 둘러싸고 있고 중정이 자리하고 있는 오래된 석조건물이었다. 건물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퀴퀴한 냄새와 중정으로만 나 있는 창문은 환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방도 제대로 안되어 잘 때는 이불과 체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거기에 비하면 이번 호텔은 천국이다.
프런트에서 우리를 맞이한 직원은 렌터카 회사의 직원과는 정반대로 매우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인도 억양이 섞이기는 했지만 영어 발음도 정확하고 또렷하다. 호텔의 장식이나 객실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니 호텔의 주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인 모양이다. 유럽의 한 복판에서 만나는 부처님 그림이라니, 익숙한 그림이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낯설다. 똑같은 물건이나 사건이라도 주변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지만 처음 외국에서 마주친 한국 차들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짐을 풀고 정리를 한 후 저녁 식사를 위해 방을 나섰다. 프런트에서 소개받고 찾아간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건지 토요일 저녁은 쉬는지 문이 닫혀 있었고, 동네 구경 삼아 한 바퀴 돌아본다. 유럽 주택가의 주말이 펼쳐진다. 운동장에선 동네 청년들끼리 축구를 즐기고 있고, 자그마한 피자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다. 그다지 맛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자동차 대리점과 수리점, 중고차 매장, 타이어 가게, 세차장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이 블록은 자동차와 관련된 업체들이 모여 있는 곳인 모양이다. 주말이라 모두 문을 닫은 게 아쉽다. 평일 낮이었으면 좀 더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두어 블록을 돌아 호텔 인근으로 돌아오니 호텔 옆 상가 주차장에 발칸 음식이라고 적힌 식당이 있다. 식당은 엉성한 가건물이고 주차장 한 편으로 천막을 쳐 놓은 실내 식탁 몇 개, 그 앞으로 노천 식탁 몇 개를 마련해 놓고 있다. 그림을 보니 고기 위주의 케밥 비슷한 요리이다. 이미 식사 중인 손님들의 식탁을 보니 맛있어 보인다. 식당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려니 영어가 안 통한다. 혜진이의 독일어는 아직 이 사람들이 알아먹지를 못한다. 결국 메뉴의 그림을 보고 주문을 마쳤다. 저물어 가는 오후 햇살이 아쉬워 앞마당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닭고기와 돼지고기, 샐러드가 푸짐하게 얹힌 접시 세 개가 우리 테이블로 온다. 사진보다도 먹음직스럽다. 기내식으로 두 끼를 때우고 나면 뭔들 맛이 없을까 싶지만 우리 셋 모두 정말 맛있게 먹는다. 제대로 된 숯불에 익힌 불맛이 입맛을 돋운다. 한데 문제는 벌. 꿀벌 같지는 않고, 살짝 파리에 가까운 쪼끄만 벌이 날아온다. 처음 한 마리가 정찰을 하고 간 모양이다. 쫓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서너 마리가 달려든다.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어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벌들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다른 손님들은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냥 손으로 휘휘 저어가며 식사를 이어간다. 벌들과 함께 독일에서의 첫 끼는 넉넉하게 해결했다.
“배부르니 이젠 살 것 같네.”
“아저씨들은 험상궂게 생겼지만 음식은 맛나네요. 벌들만 아니었음 좀 더 느긋하게 먹고 나오는 건데…”
“우리 저기. 슈퍼마켓 구경하러 갑시다.”
마침 길 건너에 큼직한 슈퍼마켓이 보인다. 독일의 슈퍼마켓은 어떤 물건들을 팔까? 가격은 어느 수준일까? 외국에서 빠뜨릴 수 없는 재미가 슈퍼마켓 구경이다. 이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는지, 물가는 어떤지, 뭐가 싸고 뭐가 비싼지 등등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 슈퍼마켓이다. 독일의 슈퍼마켓은 일단 맥주가 싸다. 우리나라도 만 원에 4, 5 개씩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 맥주가 1, 2 유로 정도. 그것도 묶어서 파는 게 아니고 개당 가격이다. 물 하고 별 차이가 없다. 역시 독일은 맥주의 나라다. 맥주 말고도 햄과 치즈, 소시지 종류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싸다. 과일이나 채소가 살짝 비싼 듯하긴 하지만 전반적인 물가 수준은 우리나라와 크게 차이 날 게 없을 듯하다. 가볍게 입가심할 수 있는 몇 가지 과일과 과자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창밖으로는 늦은 노을이 매직 아워를 만들고 있고 하늘에는 비행운이 어지럽게 엉크러져 있다. TV를 잠깐 켜 보았지만 영어 채널도 찾기 쉽지 않다. 노트북을 켜고 한국의 소식을 찾아본다. 유럽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