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뜻밖의 유럽...

여행은 늘 얼떨결에 떠나는 법

by 기타치는 사진가

“유럽이 장난이냐?”


유럽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 주말마다 당구 치는 친구가 여행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묻기에 질문에 비행기표, 첫날과 마지막 날의 숙소, 렌터카 예약을 끝냈으니 거의 다 되었다고 대답을 했더니 대뜸 돌아온 말이다. 누가 장난으로 유럽을 가나? 하긴 그 녀석 성격이라면 지금쯤 시간대별로 스케줄이 나와야 하고, 세 끼니는 각각 어디서 해결할 것인지 구글 검색 결과 목록이 나와 있어야 하고, 만약 문을 닫았을 경우에 대비한 예비목록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거다. 이런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대충 굵직한 것만 예약해 놓고는 거의 다 되었다니 장난으로 보일 수밖에. 1996년 처음 아내와 둘이서 유럽으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항공권과 렌터카만 예약해 놓고 무작정 가방 싸서 스위스로 떠났었다. "숙소? 못 구하면 차에서 자면 되지."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서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서 호텔이나 여관에 대한 사진도 볼 수 있고, 이미 거쳐간 사람들의 평가도 수백 개씩 올라와 있으니 확실한 일정이라면 숙소 정도는 예약해 놓고 가는 게 낫다. 하지만 우연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하기에 대략적인 일정만 정하고 떠난다. 아이들도 이런 아빠의 여행 습성에 익숙해져 있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마냥 느긋하다.


며칠 앞두고 환전을 하고 해외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 면허증을 받아 들고 나니 이제야 조금 여행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아이들도 이제야 본격적으로 여행 가서 보고 싶은 것들을 조사하고 있다. 위시리스트에 장소 목록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한 달쯤 전 여행을 결정하고 아이들에게 희망사항을 물었다. 큰 딸 혜진은 베를린을 꼭 가야 한다고 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베를린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유혹이 엄청난 모양이다. 혜나는 브뤼셀을 고집했다. 어릴 때 파티시에를 꿈꾸던 녀석인지라 아직도 초콜릿이라면 자다가도 눈 비비고 나와 한 조각 먹고 들어간다. 유럽이라니 벨기에의 초콜릿은 꼭 구경하고 맛보고 와야 한단다. 두 번째로 가고 싶은 도시를 물으니 바젤과 하이디 마을이 나왔다. 바젤은 혜진, 하이디 마을은 혜나의 선택. 일정을 어찌 짜야 하나 고민에 들어갔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프라하-잘츠부르크-하이디 마을-바젤-브뤼셀을 거쳐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원형 코스를 그려 보았으나 7박 9일 동안 3,500킬로미터를 돌아야 했다. 반나절 이동하고 반나절 구경하는 빠듯한 일정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서 베를린과 브뤼셀을 따로 여행한 후 바젤과 하이디 마을은 같이 돌아다니는 코스였다. 다행히 혜진이가 혼자서 베를린을 다녀올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기에 가능한 코스.


코스가 확정되고 나서 출발하기 사나흘 전쯤 브뤼셀과 베를린의 숙소도 예약을 마쳤다. 바젤과 하이디 마을을 위해서 루체른 인근으로 에어 비엔비를 하나 잡아 놓았다. 이제 정말 준비 끝이다. 한데 셋만 떠나려니 영 마음이 무겁다.


애초에는 혜나만 유럽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니는 회사의 여름휴가 일정을 미리 신청하고 행선지를 유럽으로 마음먹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혜진이는 2학기가 되면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날 예정으로 열심히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기로 했던 독일의 대학에서 거절 통보가 왔다. 국내 학교 측에서도 별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 결국 독일에서 한 학기 공부하려던 계획은 물 건너 가버렸다.


“혜나 휴가 갈 때 언니도 데리고 가라.” 아내가 느닷없이 말을 꺼낸다. 괜찮은 생각이다. 한 학기는 물 건너갔지만 대신 일주일 정도라도 구경하고 오면 좋을 테니 말이다. 혜나도 혼자 패키지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언니와 같이 다니는 편이 나을 테고. 한데 두 녀석의 여행 포인트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혜진이는 오로지 미술관과 박물관, 혜나는 초콜릿과 빵. 이래 가지고는 패키지도 힘들다.


"그럼 당신이 애들 데리고 다녀와."

"내가? 나만? 당신도 같이 가야지. 어떻게 나랑 애들만 달랑 여행을 가."

"난 엄마 챙겨야 해서 도저히 시간이 안돼. 당신이 스케줄 잘 짜서 애들 데리고 갔다 와."

"그럼 너희들이 일정을 변경할 수 있겠는지 생각 좀 해 봐."

"난 회사에서 일정을 다 맞춘 거라서 바꾸려면 9월 이후라야 돼요."

"음... 그게... 난 9월 이후면 개강하는데..."

"혜진이 너는 휴학한다며?"

"그래도 청강하고 싶은 과목이 있어요. 개강하면 중간에 빠질 수는 없어요."


여행 일정을 바꿀 수는 없고, 장모님을 챙겨 드려야 하는 아내의 일정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 결국 셋만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내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었지만 두 딸내미의 기회를 날려 버리기엔 너무나 아깝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가족을 사랑하는 아내는 자기의 몫을 선뜻 나중으로 미뤘다. "다음에 나 혼자 여행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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