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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재잡담

'거시기'의 비밀을 파헤치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전라도 사투리의 비밀

by 기타치는 사진가

"어이, 친구, 변산 쪽으로 여행 함 가볼라나?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날씨도 좋은데 말여."

"좋지."

"실은 내 고향이 그짝이라 잠깐 일 좀 볼 거이 있는디... 30분 정도..."

"염려 말어. 같이 가자구."


이렇게 변산과 채석강, 내소산을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다. 저녁식사와 잠자리는 친구 녀석의 고향 친구에게 의탁하기로 했다. 오랜 친구라 그 정도 신세 지는 건 괜찮단다.


채석강 옆에서 점심을 먹고, 내소사를 구경하고 관음봉에 올랐다. 한눈에 펼쳐지는 곰소 앞바다가 인상적이다. 날씨가 좋지는 않아 멋진 일몰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읍 외곽의 친구 집으로 향했다. 매운탕과 목살을 준비해 놓은 친구의 친구는 우리의 먹성이 시원치 않자 동네 형님을 부른다. 미용실 하시는 분이라 식사가 늦으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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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의 전경과 관음봉 오르는 길에 내려다 본 풍경


"매운탕이 거시기할 텐데 쪼메 뎁힐까요?"

"아녀, 거시기하니 괘얀쿠먼."


전라도 토박이끼리의 대화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거시기'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이따금씩 '앗따' 같은 추임새를 곁들이기도 하고, '쪼까' 같은 부사가 따라오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앗따, 거시기하구먼." 혹은 "쪼까 거시기하지라."


나로선 도무지 무슨 대화가 이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 친구는 대충 알아먹는 눈치. 이게 무슨 조화람? 여행을 다녀와서 일주일 내내 고민을 했다.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고, 상당히 타당해 보인다. 이제 이 가설을 입증하는 일만 남았다.


['거시기'는 텔레파시 채널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명령어]라는 가설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텔레파시 채널을 가동하는 데에는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거시기'라는 명령어를 통해 채널을 열고 닫는다. 우리 귀에 '거시기'라고 들리는 잠깐 사이에 그들 사이엔 필요한 데이터가 오고 간다. 음성 데이터보다 훨씬 높은 주파수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주 짧은 순간에도 많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거시기'면 충분하다.


'거시기'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쪼까'와 '앗따' 역시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 명령어인 듯하다. 쓰임새로 비추어 보건대 '앗따'는 데이터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명령어로 보인다. 이미 보낸 데이터보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데이터라는 표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 '쪼까'는 무슨 기능일까?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데이터를 수정하는 명령어 아닐까 싶다. '거시기'를 통해 이미 보낸 데이터 중 수정이 필요한 일부 데이터를 '쪼까'라는 꼬리표를 달고 보내는 것이 아닐까? 텔레파시 채널은 음성 대화보다 훨씬 비싼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암호화를 위한 명령어나 위상 변조를 위한 명령어도 분명히 있으리라.


"매운탕이 끓인 지 오래되어 식어서 맛이 없을 겁니다. 미리 데워 놓지 못해 미안합니다. 다시 데울까요?"

"아니, 아직 따뜻해서 밥 먹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저녁 챙겨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런 수고 할 필요 없으니 괜찮아."


가설에 입각하여 텔레파시 채널로 오고 갔을 데이터를 추정해 보았다. 위 대화의 밑줄 친 부분이 '거시기'라는 명령어 뒤로 순간적으로 오갔던 것이다. 현장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순간의 표정을 보면 전보 보내듯 글자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미안함과 고마움, 맛에 대한 감상 등 마음과 느낌이 총체적으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이 자리로 이끈 내 친구 녀석은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금까지 30년 동안이나 숨기고 있었다니, 대단하다. 그야말로 거시기한 놈이다. 친구, 이런 비밀을 알게 해 주어 고맙네.


관음봉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해진 후 솔섬. 감도를 극단적으로 올렸더니 사진이 거칠다.


저녁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준 고마운 친구네 집 마당에 탐스럽게 익은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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