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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재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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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사진가 Nov 20. 2018

마을을 지키는 나무와 친구 먹기

김제 미즈노 씨의 트리하우스

"이쪽 나무가 원래 마을 당산나무였어요.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시던 곳이지요. 근데 몇 년 전 마을회관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고 나무 밑에는 쓰레기만 쌓이더라고요. 나무가 너무 불쌍하고 외로워 보였어요." 


나무가 불쌍하다니, 중년 남성의 감성 치고는 너무나 여리고 아름답다. 나무 위 다락방에 올라 창밖의 풍경에 감탄하던 중 미즈노 씨가 트리 하우스를 만들게 된 연유를 이야기한다. 일본인 특유의 악센트가 아직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의 한국어는 완벽하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시골 마을에서 나무 위에 집을 지어 놓고 아이들 놀이방으로 쓰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계단을 올라가면 트리 하우스의 현관쯤 되는 공간이 나온다. 본격적으로 사다리를 기어 올라 마루에 다다르면 집 앞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구 한 마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손님들을 올려 보고 있고, 닭장 속에는 흰 오골계들이 모여 있다. 허리춤으로 뻗어 있는 굵은 나무 가지를 피해 옆으로 돌아가면 아늑한 다락방이다. 사방으로 열려 있는 창으로 동네가 모여든다. 까치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이럴 것 같다. 잔가지들 사이로 지평선이 펼쳐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아른거리는... 어릴 적 동화에서만 만나던 나무 위의 다락방에 실제로 올라와 앉아 있으니 주변의 모든 것이 동화처럼 파스텔 색으로 바뀐다. 날이 좀 더 따뜻했더라면 여기서 잠깐 졸아도 좋았겠다. 


집으로 내려와 커피 한 잔 하면서 들은 미즈노 씨의 이야기는 트리하우스처럼 마냥 동화 같지는 않다. 누구나 그렇듯이 삶의 무게는 녹녹지 않고, 아이 다섯을 키우는 일은 아무리 시골이라도 팍팍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삶의 터전이던 홋카이도 삿포로를 떠나 김제 시골 마을에 와서 살게 된 사연은 아름다운 동화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사람들에게서 읽을 수 있는 삶에 대한 초연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는 내 생각과 많은 부분 일치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뿐이지만 그는 실천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미즈노 씨이지만 마치 10년 지기를 만난 듯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저는 분명히 백제의 후손이라고 확신합니다. 김제 평야에 살게 된 것도 어쩌면 오랜 인연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전 여기 살면서 한국과 일본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너무 모른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을 잘 아는 일본인을 만나면 반갑다. 일본을 10년 동안 오가며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확인해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접했던 일본은 내 선입견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과 일본은 깊은 곳에서 서로 맞닿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역사적인 이유로, 혹은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굳이 꺼내어 확인하지 않을 뿐. 자칫 잘못 이야기하면 내선일체를 이야기하는 거냐는 오해를 받기 일쑤이고, 잘해봐야 현대판 친일파로 인식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즈노 씨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 친구와는 술잔을 기울이며 좀 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벗과의 늦가을 여행길에 뜻하지 않은 친구를 새로 알게 되어 행복하다.


미즈노 씨의 집은 술 한 잔 할 수 있는 바도 있고, 마루에서 미즈노 씨가 내려 주는 커피도 좋다. 집은 미즈노 씨의 취향대로 아가 자기 하게 꾸며져 있고, 곳곳에 숨어 있는 어항들을 찾아 물고기와 달팽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극히 일본적인 코다와리가 한옥 구석구석 담뿍 스며들어 있다. 미리 연락을 하면 하루 밤 자고 갈 수 있는 작은 손님 방도 마련되어 있다. 현실의 팍팍함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가꾸어가는 미즈노 씨를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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