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가격 전쟁 속에서 사라져 가는 역사 속의 이름들
고향을 잃어버린 충무김밥
충무김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김에 밥을 말고, 매콤하게 무친 오징어와 어묵, 아삭하게 익힌 무김치를 따로 내어주는 음식이다. 원래는 충무시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이어서 충무김밥으로 불리고 있지만, 1995년 충무시와 외곽의 통영군이 통영시로 통합되면서 충무김밥은 출처가 불분명한 음식이 되어 버렸다. 25년이 되어 가는 지금, 이미 충무김밥은 서울의 충무로에서 만들어졌다는 오해가 생길 정도인 걸 보면 2~30년쯤 더 지난 후에는 어쩌면 충무공이 개발한 전투식량이라는 터무니없는 유래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한반도 남해안 도시들을 여행해 보면 거의 모든 도시들이 충무공을 자기 도시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포 유달산 등산로 입구에는 충무공 동상이 들어서 있고, 여수항 광장에는 거북선이 자리 잡고 있다. 통영 역시 강구항의 거북선과 이순신 공원 등으로 충무공이라는 콘텐츠를 활용하려 애쓰고 있다.
물론 제승당, 통제영, 세병관, 충렬사 등의 유적을 감안한다면 통영이 다른 도시보다 충무공이라는 콘텐츠의 지분을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충무시’라는 이름보다 강력한 소유권이 있었을까?
후쿠오카를 가는데 하카타에서 내리는 까닭은?
일본 불매 운동으로 거의 중단되기는 했지만 일본 여행이 흥할 때 많이 찾던 도시 중 후쿠오카라는 도시가 있다. 우리나라와는 가장 가까운 도시이기도 하거니와, 주변으로 온천관광을 떠나기 아주 좋은 기점 도시라는 점에서 인기 있는 곳이었다.
후쿠오카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나카스 강을 경계로 후쿠오카와 하카타라는 두 도시가 번성하고 있었다. 후쿠오카는 정치의 중심지로, 하카타는 항만을 끼고 있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두 도시가 커지면서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89년 결국 후쿠오카라는 이름으로 통합된다.
이름에 대한 격렬한 논쟁 끝에 도시 이름은 후쿠오카로, 중앙역과 항구의 이름은 하카타로 정해진다. 아울러 하카타항과 하카타역을 포함하는 하카타 지역은 하카타구라는 행정지역으로 남는다. 후쿠오카를 가더라도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면 하카타항에 내리고, 도쿄나 오사카에서 신칸센을 타면 하카타역에 내린다. 관광호텔이나 비즈니스호텔 대부분 하카타 구에 자리 잡고 있다. 하카타라는 도시는 사라졌지만 일본이 세계로 드나들던 하카타라는 이름은 여전히 교통과 관광의 중심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스치듯 살펴보는 교하의 역사
우연한 기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지도 전시회를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지사. 거의 모든 지도에 교하는 파주, 고양과 나란히 독립적인 지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고려시대의 지도에는 파주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교하는 존재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서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내륙 하천 운송의 출발점인 교하는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교하’라는 지명은 본래 고구려의 천정구현이었으며 통일신라 이후 교하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세종실록 148권 지리지편).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교하는 현, 군으로 변동이 있기는 했지만 독립적인 지방 행정단위로 기능해 왔다. 교하와 파주가 통합된 것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결과였다.
교하지구와 운정신도시-사라져 가는 교하
현재 지도에서 교하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운정과 금촌 사이 교하동이 나온다. 한강과 임진강을 아우르며 파주와 이웃하던 교하는 이제는 자그마한 시골 동네로 오그라들어 버렸다.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유구한 세월 독립적인 행정단위로 지위를 누리던 교하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97년 파주시와 토지개발공사가 교하읍 일원에 1만 세대 규모의 택지 지구를 개발하기로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하읍에 들어서는 택지지구이니 당연히 교하택지개발지구로 명칭이 붙게 되었고, 이후 교하지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한편 2001년 정부의 2기 신도시 계획에 따라 마찬가지로 교하읍 일원에 새로운 신도시가 계획된다. 이미 진행 중이던 교하지구와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지역의 기차역인 운정역의 명칭을 가져와 운정신도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교하 지역에 만들어진 신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교하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의 출발점이다. 이후 2007년 운정 3 지구를 추가로 지정하면서 기존의 교하지구를 통합하여 운정신도시가 완성된다.
2011년 신도시가 자리 잡아가면서 읍과 리로 나뉘어 있던 행정구역을 정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하읍은 교하동, 운정 1,2,3동이라는 행정구역으로 재편된다. 교하읍에 소속되어 있던 동패리, 서패리 등은 각각 동패동, 서패동으로 자리 잡게 되고, 과거 교하읍 교하리 지역이 교하동이라는 법정동으로 지정되면서 운정신도시와는 관계없는 지역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최근 들어 운정신도시 내의 행정동으로 그나마 남아 있는 교하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려는 움직임이 일부 교하지구 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운정신도시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하지구라는 명칭 때문에 신도시의 혜택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게 이유인 듯하다. 결국 교하에 들어선 신도시 때문에 교하라는 이름이 사라질 위기인 상황이다. 지역은 번성할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정작 그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질 수도 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적인 상황을 주민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 (추신: 2023년 운정신도시에 속해있던 행정동 교하동은 운정5동으로 명칭이 변경된다.이로써 운정신도시 내의 '교하'라는 지명은 완전히 사라지고 교하도서관, 교하중고등학교 등의 명칭만 남게 된다.)
버리기엔 너무나 소중한 교하
이쯤에서 다시 한번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충무김밥과, ‘충무’라는 훌륭한 이름을 버리고 뒤늦게 ‘이순신 공원’을 만들어 목포 유달산의 충무공 동상과 여수의 이순신 광장과 힘들게 경쟁하고 있는 통영시의 한숨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배와 기차로 후쿠오카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문화 교류의 통로였고 각종 해외 산물의 집산지였던 하카타의 영광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는 후쿠오카 시민들의 지혜를 떠올려 보자.
지역의 이름은 그 지역의 인문학적 정체성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 ‘교하’라는 명칭은 두 강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상징성을 떠올려 보아도 좋다. 조선왕조실록에 교하는 400여 차례 등장한다. 파주와 고양이 각각 600여 차례 나오는 것과 비교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다.
태종 이방원에게 왕위를 빼앗긴 정종이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하 지역을 자주 찾아왔던 까닭은 무엇일까(태종실록 30권)? 교하에서 태어났지만 11살에 중국으로 공녀로 보내진 어린 소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세종실록 33권)? 교하에서 시작된 바람을 견디는 볍씨에 대한 연구는 과연 성공했을까(세종실록 79권)? 교하로 도읍을 옮기고 북방으로 진출하려 했던 광해군의 꿈이 좌절된 연유는(광해군일기 65권)? 드라마나 소설, 영화의 소재로 언제든 사용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교하에는 그득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운정신도시, 파주시의 콘텐츠이고 문화적 자산이다.
교하는 조선의 한양이 세계와 만나는 통로였고 서울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뱃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떡해서든 ‘교하’라는 이름을 우리 가까이 남겨 두어야 한다. 교하냐 운정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운정신도시가 교하라는 지리적, 역사적 자산을 어찌하면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가 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통영에 왠 충무김밥집이 잔뜩 있는 거야? 통영이면 통영 김밥 아냐?’ 같은 질문에 구구절절 과거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곤란하다. 하루 이틀의 아파트 값에 신경 쓰다 흘려버리기에 ‘교하’는 너무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산이다. 버릴 궁리 대신 살려서 활용할 방안을 지혜롭게 찾아보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