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럽 한복판에서 고려 활자를 만나다니...

바젤 제지공장 박물관

by 기타치는 사진가

바젤의 거리 역시 스위스의 여느 도시만큼이나 깔끔하다. 세월의 흔적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디젤 자동차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탓인지 배기가스의 냄새도 맡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큰 트럭은 도심에 들어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잘 마련되어 있는 자전거 길로 경쾌하게 자전거들이 달리고 있다. 운전대를 잡고 겪었던 거리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역시 유럽의 도시는 걸으면서 느껴야 제맛인 듯하다.


거리 사진을 찍으며 가다 보니 두 녀석은 훌쩍 앞서 가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신나게 하는지 표정이 밝다. 혜진이와 혜나는 어릴 때부터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나이도 3년 반이나 차이가 나는대다 또래보다 빨랐던 혜진에 비해 혜나는 또래보다 조금씩 늦었던 탓에 실제로는 좀 더 터울이 느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두 녀석은 늘 한편이 되어 엄마나 아빠에게 따지고 들었지 자기들끼리 투닥거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셋이 다니는 여행에서 이건 정말 복 받은 일이다. 아내도 없는 상황에서 두 녀석이 다투기라도 하면...




거리는 살짝 내리막이 되는가 싶더니 이내 라인강변으로 이어진다. 저 멀리 높이 솟은 바젤 성당의 첨탑이 보이고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녹색의 트램이 지나간다. 짙은 뭉게구름이 잔뜩 뒤덮고 있는 하늘과 짙은 녹회색의 강물, 이미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강변의 풀밭이 바로크적인 도시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강 건너에는 아파트인지 쇼핑센터인지 70년대 풍의 큰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바젤 제지공장 박물관은 라인강변에 바로 붙어 있다. 강변의 공원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주택가 건물 벽에 Basler Papiermühle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간판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수로를 따라 냇물이 흐르고 있고 그 위로 지름 5미터 정도 되는 큼직한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아마도 이 물레방아를 동력원으로 사용해 왔던 모양이다. 물레방아를 지나면 두 갈래로 안내가 나뉜다. 오른편에는 손님들이 알아서 짐을 보관해 두는 공간이고 왼편으로 돌아가면 기념품 가게와 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중세시대부터 운영되던 제지공장과 인쇄소를 1980년에 리뉴얼하여 박물관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한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온갖 기계들로 가득하다.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쌓고 있는 기계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사용했던 것들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밖에서 본 물레방아는 역시 내부의 기계들과 연결되어 동력을 공급하고 있다. 한 켠에서는 초등학생 열 명 정도가 모여 종이 만드는 실습을 하고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기계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공장 같다가도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꼼꼼히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면 이 곳이 박물관임을 실감하게 된다.


20180824-NDF_8471.jpg
20180824-NDF_8475.jpg
20180824-NDF_8488.jpg
20180824-NDF_8483.jpg
20180824-NDF_8470.jpg
20180824-NDF_8495.jpg

종이와 책을 만드는 설비 중 중요한 것들은 지금도 전시용으로 가동하고 있고, 쓰지 않는 장비를 치운 공간에는 관련된 물건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까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꼼꼼하게 큐레이팅을 한 흔적이 보인다. 한 층씩 전시장을 올라갈수록 종이는 정보로 진화해 간다. 종이가 모여서 책이 되고, 신문이 되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인류가 정보를 어떻게 관리해 왔는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잘 정돈된 전시 공간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공간이다.


활판인쇄를 설명하는 코너에는 백발의 기술자가 주물에 납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과정을 재연해 주고 있다. 아마도 60대 중반 정도? 그가 작업하는 테이블 앞에 태블릿이 한 대 놓여 있는데 2-30대 시절의 그가 작업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다. 완전히 동일한 동작이 태블릿과 눈 앞의 책상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같은 사람이 3-40년의 시차를 두고 말이다. 아마도 몇 백 년 동안 같은 동작이 이어져 왔지 않았을까? 사람만 바꿔가며 말이다. 예전에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겠지만 이제는 박물관에 박제되어 남아 있다. 저 아저씨가 은퇴하고 나면 아마도 화면만 남게 되겠지. 그나마 스위스이니 저 아저씨가 아직까지 저 작업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다른 일을 찾아야 했을 거다.


파주 출판도시에도 활판인쇄 공방이 있다. 이 곳과 비슷하게 활자를 가지고 활판을 만들어 인쇄하는 과정을 기계와 함께 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이 곳과 비교하면 공방과 박물관이라는 이름만큼의 차이가 있다. 공간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목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고민, 기존 공장의 작업 동선과 박물관의 관람 동선을 중첩시켜 효율을 높인 큐레이션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출판 디자인을 공부했던 혜진이는 오래된 인쇄기계들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나도 인쇄출판 산업과는 연관된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들어 낸 기계들이 인상적이었다. 역학적인 계산이 정밀하지 못했던 시절 만들어진 기계들은 그 투박함 속에 감추고 있는 강인함이 매력적이다. 최대 강도의 몇 배의 힘을 버티도록 만들었다고는 해도 요즘 기계들의 만듦새는 불안한 구석이 있다. 특히 탄소섬유라던가 강화 플라스틱 같은 신소재들은 빈약해 보이는 생김새로 인해 더욱더 불안감을 키운다.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100년 전 타자기와 30년 전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를 보면서 전자적 메커니즘에 대한 불안감은 조금 더 커진다. 프로그램을 짜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어도 어쩔 수 없이 나도 옛날 사람이 되어간다. 골동품 기계들을 구경하는 사이 혜나는 기름 물감을 물에 띄워 종이에 찍어 내는 마블링 작업 체험으로 훌륭한 기념품 하나를 얻었다. 그렇게 우리는 바젤에서 또 하나의 고급스럽고 알찬 추억 하나를 챙겨 간다.


keyword
이전 25화24. 또다시 바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