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 제4탄
제지공장 박물관을 나서니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바람이 차다. 옷매무새를 다잡으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살짝 달아오르는 듯하다. 뭐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70년대 페라리가 딱! 그 뒤로는 콜벳! 그것도 빨강! 이건 꼭 찍어야 해 싶어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로 들여다보니 또 다른 클래식 페라리들이 앞뒤로 나란히. 몇 컷 서둘러 찍고 살펴보니 3-40년은 족히 되었을 듯한 자동차들이 열 대 가까이 행진을 하고 있다. 납작하고 화려한 색상의 올드카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것은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지 싶다. 거리의 사람들이 죄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차량 행렬을 앞서 걸으며 찬찬히 들여다보는 행운을 얻은 것은 순전히 바젤 시내 교통의 복잡함 덕분이다.
차가워진 오후 날씨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아이들도 신기한 자동차 행렬에 카메라를 꺼내 들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우와! 이런 자동차는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신바람 난 아빠의 모습이 재미난 모양이다. 아이들 표정이 밝아진다. 하긴 난 유난히 자동차를 좋아했었다. 그 맘 때의 남자아이들이 다들 그렇긴 하지만 70~80년대에 생산된 거의 모든 국산 승용차의 재원은 다 외우고 다녔다. 어떤 모델은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 생산했고, 배기량이 얼마나 되는지, 오리지널 모델인지, 아니면 외국에서 들여온 모델인지 등등. 80년대 중반 대학 다닐 때 일찌감치 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자동차의 구조에도 재미를 붙였었다. 동네 카센터에서 자그마한 수리라도 할라치면 사장님 바로 옆에 붙어서 들여다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덕분에 몇 년 후에는 타이어 공기압 점검이나 바퀴 교체, 엔진오일 교환 정도의 작업은 내가 직접 하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뜻하지 않은 클래식 자동차들의 행렬이라니.
멋진 자동차 행렬의 맨 앞은 폭스바겐 앰뷸런스가 이끌고 있다. 앞 창문에 74라는 번호표를 붙이고 있는 걸 보니 어디선가 올드카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뒤로 따라가는 차는 오펠이다. 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대우자동차가 로열 레코드라는 이름으로 들여와 생산했던 모델이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자동차. 굳이 최고급 스포츠카가 아니어도 오래된 자동차는 스스로의 포스를 뿜어낸다. 대량 생산되어 대중적으로 소비된 모델일수록 일정 수준 이상의 내구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20년 이상을 버티려면 큰 사고 없이 운행을 해야 할뿐더러 주인의 정성과 노력이 엄청나게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새로 나온 샤방한 신차의 유혹과 최고 수준의 마케팅 공세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아닐까?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나 조수석에 타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행인들의 부러움을 즐기고 있다. 모두들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거리 구경을 하는지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자전거로 거리를 달리던 젊은이는 혹시라도 스치고 지나칠까 조심스럽게 차 사이를 지나가고, 트램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재미난 구경인 듯 미소를 머금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회색빛 대리석 건물 사이로 오래된 전차가 달리는 바젤 거리에서 70년대 자동차들은 아주 잘 어울린다. 특히 빨강 페라리와 콜벳은 바위틈으로 비집고 피어난 주목 나무의 열매처럼 빨갛게 빛나고 있고, 낮게 웅웅 거리는 배기음은 바위 사이의 벌집만큼이나 주변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몇십 년 아니 몇백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나다녔을 조용한 거리가 일순간에 작은 요동을 겪는다. 쉽게 변하지 않는 옛 것과 쉽게 변하는 옛 것이 만들어내는 파장이 섞이면서 재미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이번 여행에서 겪은 가는 날이 장날 4탄으로 충분한 즐거움이었다.
부지런히 차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 시내를 빠져나오다 보니 시내 곳곳에서 분주히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다. 각종 푸드 트럭들이 자리를 잡고, 무대를 꾸미고, 만국기를 걸고 하는 모습을 보니 브뤼셀의 거리 축제가 떠오르면서 바젤을 떠나기 싫어진다. 아마도 미리 예약을 해 두지 않았더라면 오늘 밤은 바젤에서 머물렀을 텐데. 여름을 보내는 축제를 구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