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또다시 바젤

너무나 유럽스러운 도시, 너무나 사랑스러운 도시

by 기타치는 사진가

티틀리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바젤로 향한다. 바젤은 라인강을 끼고 있는 스위스 제3의 도시이다. 스위스에 속한 도시이기는 하지만 도시의 경계는 프랑스와 독일에 걸쳐 있기 때문에 3개국 8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바젤의 경제권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중 스위스인은 17만 명 정도. 오는 길에 들렀던 비트라 캠퍼스도 바젤 권역이지만 독일 땅에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바젤 국제공항은 프랑스 지역에 있으며 프랑스, 독일과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다. 거대한 제약회사의 본부가 바젤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흔히 은행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BIS 자기 자본비율을 만들어 낸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이 바젤에 있는 걸 보면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혜진이가 바젤을 고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넓지 않은 바젤 시내에 4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계획으로는 그제 비트라 캠퍼스를 보고 나서 바젤 시내에 있는 미술관 몇 곳을 더 보고 루체른으로 올 생각이었단다. 한데 비트라 캠퍼스가 워낙 볼거리가 많았던 탓에 바젤 시내에는 들르지도 못했다고. 워낙 아쉬워하는 탓에 일찌감치 바젤로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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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을 지나 한 시간쯤 달리니 비가 그친다. 그나마 다행이다.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리니 바젤이다. 바젤 시내로 들어오니 브뤼셀에서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낯설고 좁은 유럽 도시의 낡은 길, 그 위를 달리는 트램들, 수시로 바뀌는 신호등과 그 신호조차 무시하고 길을 건너 다니는 사람들, 소리 없이 지나치는 자전거... 심지어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한심하다. “Make a U-turn when possible.” 가능할 때 유턴을 하라니. 유턴을 해도 되는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혜진이가 원하는 미술관 앞까지 무사히 찾아오긴 했지만 인근에 주차장을 찾을 수가 없다. 한참 동안 주변을 돌다 바젤 역 근처 공영 주차장을 찾아 간신히 차를 댔다.


점심을 위해 인근의 푸드코트로 향했다. 거대한 돔 천장 아래 자리 잡은 푸드코트는 동서양의 다양한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 나라 출신일 듯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만드는 음식들을 보니 모두 다 먹음직스럽다. 초밥과 햄버거도 있었지만 혜나와 난 먹음직스러운 베트남 음식을 골랐고, 혜진이는 중동 지역의 음식을 골라왔다. 한국 음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다들 푸짐하고 맛있다. 한 곳에서 세계 각지의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는 것, 게다가 그 음식들이 대부분 현지 출신들이 만든다는 것, 우리나라에선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글로벌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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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혜진이가 가고 싶어 했던 스위스 건축 박물관으로 향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웃으면서 다녀.” 혜나가 말을 꺼낸다.

“그러게. 다들 기분이 좋은 가봐.” 혜진이가 맞장구친다.

“난 잘 모르겠던데. 딴 도시에선 다들 인상 쓰고 다니던?” 운전하느라 사람들 표정까지는 볼 틈이 없었던 내가 물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 동네 사람들 표정이 훨씬 밝아요.”

“맞아 맞아.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 같아.”


둘이 모두 느꼈다니 그런 모양이다. 스위스 건축 박물관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천천히 시내 구경하면서 걷는다. 운전할 때는 마주치기 싫었던 트램이지만 걸으면서 보니 날렵한 디자인과 단순한 색상이 도시와 잘 어울린다. 1895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했다고 하니 100년이 훨씬 넘었다. 일본의 몇몇 도시에도 노면전차라고 부르는 트램이 다닌다. 나가사키의 경우는 오래된 모델도 복원시켜 운행한다. 교통수단이면서 관광상품이기도 한 셈이다. 잘 찾아보면 3-40년대에 제작된 전차도 만날 수 있다. 바젤도 마찬가지로 공기역학적 디자인이 반영된 최신 모델과 직각의 선으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모델까지 여러 가지 트램이 같이 다닌다.



건축 박물관에서는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스위스 곳곳의 풍경을 보여주는 '풍경의 초상(Portrait of a Landscape)’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시각예술 분야는 잘 알지 못하는지라 혜진이만 따라다녔지만 이 녀석이라고 스위스의 일상에 그리 큰 관심을 둘 까닭은 없다. 가볍게 둘러보고는 입구의 뮤지엄 샵에서 포스터를 고르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시장 안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밖으로 나 있던 창이었다. 사등분되어 있는 작은 창문 가운데 세 개는 바깥의 모습이 그대로 투과하는 반질한 유리였고, 왼쪽 위 하나만 상이 찌그러지는 오래된 유리가 끼워져 있다. 무슨 사연이 있어 네 개의 유리창 중에 하나만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이 유리창에 따라 전혀 다른 시대의 건물로 보이는 것이 재미있다. 요즘은 멀쩡한 이미지에 필터 처리를 해서 이런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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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거 비행기에 들고 탈 수 있어요?”

“얼마나 크길래 비행기에 들고 갈 걱정을 하는 거야?”

“인터넷에서 얼핏 찾아보니 115cm가 넘으면 기내에 들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요.”

“그건 세 변의 길이를 합한 길이를 이야기하는 거야. 포스터 말아서 들고 가는 건 전혀 문제없어.”


판매하는 포스터 몇 장을 놓고 고민하는 혜진이에게 기념품으로 두 장을 사 주었더니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포스터를 튼튼한 박스에 포장해서 들고 나오는 녀석의 표정이 어린이날 선물을 받은 유치원 때의 표정과 완전히 겹쳐진다. 저렇게 좋을까?


스위스 건축 박물관을 나와 바젤 거리로 다시 나섰다. 오후가 되니 바람이 조금 쌀쌀해진다. 혜나의 감기 기운이 조금 더 심해지는 듯하다.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15분 거리에 있는 바젤 제지공장 박물관(Basel Paper Mill Museum)까지 걸어서 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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