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엥겔베르크, 안녕~

소소한 기억을 만들어준 자그마한 도시에게 감사를...

by 기타치는 사진가

“오늘은 뭐할 거예요?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루체른을 좀 둘러볼 생각이긴 한데 아직 특별하게 일정을 잡지는 않았어요. 어디 추천해 줄 만한 곳 있나요?”

“내가 루체른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 있는데, 멀지 않은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에요. 아주 아름답고 조용하답니다. 그리고 티틀리스 전망대도 올라갈 수 있어요. 두 분 모두 스위스가 처음이라니 분명히 좋아할 겁니다.”


96년 아내와 함께 왔던 유럽 여행 둘째 날 아침, 루체른 식당에서 만난 독일 아저씨에 이끌려 찾아갔던 곳이 엥겔베르크였다. 내가 운전하고 아내가 양보한 조수석에 앉은 독일 아저씨는 차붐부터 시작해서 축구와 자동차, 정치, 세계정세 등 온갖 분야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대충 알아듣는 것도 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 것도 있었다. 처음 지나는 길 운전하랴, 심한 독일어 악센트로 쉴 새 없이 나오는 아저씨의 수다 들어주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낯 선 사람들과 만나 이렇게 마음껏 수다를 떨어대는 이 사람들의 정서는 도대체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던 기억은 또렷하다.


엥겔베르크에 도착한 우리는 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티틀리스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려면 케이블카를 종류별로 세 번을 타야 했고, 올라가는 동안 아저씨는 명상에 대해 일장 강연을 하고 있었다. 거참, 이 아저씨는 내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지 못하다는 걸 지금쯤은 알만도 한데 계속 이야기 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와 난 오늘 하루 그럭저럭 훌륭한 가이드를 만난 셈이다.


티틀리스 전망대는 또 다른 세계였다. 4월 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추위와 칼바람이 우리가 알프스 치고도 제법 높은 알프스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케이블카로 갈아탈 즈음, 평상복은 우리 셋 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들 스키복에 스키를 들고 타고 있었고 마지막 케이블카를 내렸을 때에는 다들 주변으로 흩어져 스키를 신기 바빴다. 독일 아저씨는 멍하니 서 있는 이방인 둘을 전망대로 이끌었고,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티틀리스 꼭대기에서도 아저씨의 명상 강의는 계속되었다. 명상을 하고 있으면 추운 것도 이길 수 있다며 난간을 잡고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명상에 잠긴 아저씨를 두고 실내로 들어와 따끈한 커피를 주문하고 나니 바로 따라 들어온 아저씨의 코털엔 고드름이 맺혀 있다.


커피로도 몸을 녹일 수 없었던 우리는 결국 3,000미터라는 표지판을 뒤로하고 기념사진 한 장을 찍고 바로 내려와야 했다.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스키로 내려오는지라 케이블카는 우리 셋이 전부였고, 알아먹지 못하는 명상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엥겔베르크 시내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루체른으로 돌아와 중앙역 부근에서 아저씨와 헤어졌다. 연락처를 받기는 했으나 돌아와서 이메일을 보내니 알 수 없는 수취인이라며 반송이 되었다. 영어 발음만큼이나 악필이었던 아저씨의 이메일 주소를 두어 번 달리 바꿔 보내 봤지만 결국 연락이 닿지는 았았다. 지금도 명상은 계속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전날 오후만 해도 이리 화창한 날씨였는데...


그러고 보면 이번 딸들과의 여행에서 엥겔베르크는 내 선택인 셈이다. 베를린과 브뤼셀 중간인 프랑크푸르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바젤과 하이디 마을 사이에는 취리히도 있고 루체른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아이들에게 엥겔베르크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베를린과 브뤼셀에서 유럽의 도시들은 나름 경험했을 테니 이번에는 알프스를 보여줄 차례라고 생각했다. 이미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알프스의 삶에 대해서는 살짝 맛을 봤다. 하이디 마을과 앞마당에서 딴 민트로 말이다. 이제 자연을 느낄 차례가 되었다.


하이디 마을에서 돌아오면서 우리는 다음 날은 여행을 다시 나누기로 했다. 혜진이는 미처 찾아가지 못하고 남겨 둔 박물관과 미술관을 위해 바젤로 떠나고 혜나와 나는 티틀리스 전망대를 올라가기로. 저녁을 먹으면서 96년 엄마와의 여행에서 만났던 독일인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엥겔베르크와 티틀리스에 얽힌 인연을 이야기했었다. 저녁을 끝낼 즈음에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첫날 저녁도 그랬었다. 다음 날 새벽엔 별을 찍을 정도로 맑게 갰었다. 여기 날씨는 아침이 되면 리셋이 된다.


“어라, 날씨가 왜 이래?”

“비에다 안개라니... 이래 가지고는 전망대 가 봐야 말짱 꽝이겠는걸?”


아이들이 떠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아침에 날씨가 리셋된다는 가설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어젯밤 내리던 비가 여전히 쏟아지고 있고, 구름이 내려앉은 듯 안개가 사방을 덮고 있다. 다만 천둥과 번개만 잠잠해졌을 뿐. 일기예보를 확인해 봤지만 엥겔베르크는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내릴 예정이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하늘이 무너진 표정인걸... 혜나야, 아빠한테 말 걸지 말자. 아빠 울겠다.”


아침식사를 마칠 때까지 날씨는 달라지지 않았고, 티틀리스 전망대는 포기해야 했다. 우리는 다 함께 바젤로 떠나기로 했다. 짐 정리, 집 청소 등등을 마치고 집주인 스테파니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이미 나간 모양이다. 차도 없고 집은 잠겨 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혜진이는 숙소에 마련되어 있던 방명록 노트에 그림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에어비앤비 앱으로 간단히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적어 놓고 떠났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스테파니 역시 에어비앤비 메시지에 답장으로 아쉬움을 가득 적어 놓았다. 시내에 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가 서둘러 돌아왔는데 우리가 이미 떠나 있더라고... 방명록에 혜진이가 그려 놓은 그림과 인사말 고맙다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안개가 야속하지만 이 역시 여행의 맛이다. 경험과 재미를 얻는 한 편으로 아쉬움을 흘리고 다니는 것, 그리고 그 아쉬움을 챙기기 위해 그곳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 언젠가는 다시 가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엥겔베르크는 그런 곳으로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비 맞는 메추리를 손으로 품어 옮겨 주던 곳, 마당에서 민트를 따서 샐러드에 넣어 먹은 곳, 밤하늘 가득 별을 보던 곳, 아빠의 좌절을 옆에서 지켜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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