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리로 루체른 호수를 건너다
엥겔베르크에서 혜나의 선택인 하이디 마을로 출발했다. 상쾌한 아침 햇살이 투명하게 비추고 있는 아침 공기는 자동차의 창문을 열게 만든다. 산길을 달리는 동안 폭포처럼 밀려드는 나무의 향기란... 차 안에서도 산림욕이 가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산길이 끝나고 목초지에 다다르니 아침부터 거름 냄새가 울컥 차로 들어온다.
"어제 패러글라이딩 아저씨는 이 냄새 위로 내려왔다는 거네?" 높은 곳이 싫은 혜진이가 선수를 친다.
"어젠 별로 안 났는데, 아침에 왕창 뿌린 모양이네." 혜나가 창문을 내리며 말을 보탠다.
"패러글라이딩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빠. 똥밭에 뒹구는 수가 있을 거 같아..."
"일단 오늘 다녀오고 생각해 보자꾸나."
하이디 마을을 가려면 루체른을 지나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셋이서 수다 떨다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포인트를 놓쳤다. 회전 교차로를 직진으로 지난 후 오른쪽으로 돌아 고속도로에 진입해야 하는데 회전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해 버렸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길을 계속 간다. 가다 보면 새로운 경로를 알려줄 테니 말이다. 다만 또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 아차, 좌회전을 또 놓쳤다. 조용한 마을이고 오가는 차도 없어 조금 가다 유턴을 했다. 아까 좌회전해야 하는 곳에 다다랐다. 한데 좀 이상하다. 지도 상으로는 다리도 없고 그냥 루체른 호수뿐인데... 도착해 보니 페리 터미널이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한껏 미소를 머금고 배를 가리키며 손짓을 한다. 경로를 새로 안내하면서 'Ferry bridge included'라는 멘트에 '페리 브리지가 뭐지?' 갸우뚱하긴 했는데 진짜로 페리를 타란다. 호수를 건너는 페리라니... 이 또한 재미겠다 싶어 페리로 올라탄다. 요금은 사람과 자동차 포함하여 30프랑. 톨비라고 생각하면 좀 비싼 편이지만, 루체른 호수를 구경하며 건너는 걸 생각하면 과히 비싸지 않은 셈이다.
배 자체는 강화도에서 석모도 건너 다니던 페리선과 별 차이 없다. 익숙하게 안내에 따라 차를 대고 내렸다. 페리에 실린 자동차는 우리 차가 유일하다. 옆으로 자전거 세 대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자전거 여행 중인 남녀 한 쌍과 중년 남성, 그리고 우리 셋. 승객의 과반수를 우리가 차지했다. 타자마자 배가 출발한다. 살짝 매캐한 디젤 엔진의 배기가스 냄새도 익숙하다. 하지만 호수 너머로 마주하고 있는 알프스의 산세는 이틀째지만 신비롭다. 투명하도록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한 점의 구름은 어느 화가가 그려 놓은 것처럼 포근하다. 호수 중앙으로 나아가면서 하늘과 산과 호수가 만들어 내는 풍광이 완성된다. 혜진이와 혜나는 서로 사진 찍어 주느라 정신없다. 아침의 영롱한 햇살이 잔잔한 호수에 반사되면서 훌륭한 보조광을 만들어 주고 있다.
상부 갑판으로 올라가니 사방으로 알프스와 루체른 호수가 펼쳐진다. 뒤편으로 스위스 그랜드 투어 Grand Tour of Switzerland라는 기념사진 촬영을 위한 프레임이 마련되어 있다. 빨강 프레임이 푸른 하늘과 초록의 산자락과 잘 어울린다.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스위스 관광청에서 엄선하여 국도 위주로 짜 놓은, 1,600Km에 이르는 여행코스가 스위스 그랜드 투어라고 한다. 그 코스 중 하나인 베른에서 취리히에 이르는 코스에 루체른 호수를 가로지르는 이 페리 편이 포함되어 있다. 스위스만 집중적으로 여행할 생각이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루트인 듯하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듯한 남녀는 서로 이야기 나누기 바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가득하다. 중년의 남성은 맨 앞자리에 앉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다. 어디서 왔을까, 어디까지 가는 걸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도 애들 사진 찍기 바빴거든.
페리 여행은 20분 정도로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며 끝났다. 스위스의 전원 풍경이 펼쳐지는 한적한 국도를 달린다.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시골 풍경이 아름답다. 바쁘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느림보 자동차라고 재촉하지 않는 도로 위의 자동차들, 철저하게 지켜지는 회전 교차로 통행 원칙. 스위스가 스위스임을 느끼게 만드는 소소한 경험들이다.
"아빠, 여기 같으면 나도 운전할 수 있겠는걸? 수동변속기만 아니면..."
"맞아. 나도."
"여기나 한국이나 별 차이 없으니 도로 연수받고 운전해라. 아빠가 대리 운전비는 쏠쏠하게 챙겨주마."
"여기 사람들이 한국보다 훨씬 느긋한 걸요. 서울은 아직도 무서워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서울은 아직 운전이 쉽지 않다. 성격이나 정서의 문제일까? 운전을 처음 시작했던 80년대 후반에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 당시엔 자가용 승용차가 어느 정도 부의 상징이기도 했고, 남성성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된 이야기. 누구나 운전을 하고 다니는 지금 시대에 성격 탓을 할 수는 없다. 해외 여러 도시에서 운전해 본 경험으로는 우리나라의 도로교통 시스템이 아직 허술한 탓이 크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아주 좁은 골목길까지 통행 우선순위가 명확하게 지정되어 있다. '큰길 우선'이라던지, '내려오는 차 우선'이라던지, 배우고 외워야 알 수 있는 우선순위가 아니라 길바닥에 '멈춤 とまれ'이라고 쓰여 있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길이다. 다른 방향의 차들이 모두 지나간 후에야 지나갈 수 있다.
미국의 경우는 '전차선 일단정지 4 way stop'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교차로 입구 모든 방향으로 '4 way stop'이라는 표지판이 있고 교차로에 진입하는 차량은 무조건 정지선에 멈추어야 한다. 이후 들어온 순서대로 자기 갈 길을 간다. 나머지 대기 중인 차량은 앞서 들어온 차가 완전히 빠져나간 후에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교차로를 빠져나간다. 가끔 누가 먼저 왔는지 헛갈릴 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물 흐르듯이 통과해 나간다. 유럽은 회전 교차로를 들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점차 도입되고 있는 모양이던데, 먼저 들어와 돌고 있는 차가 우선이다. 내가 대기선에 왔을 때 돌고 있는 차가 있다면 그 차가 안전하게 지나친 후에 들어갈 수 있다.
처음 LA에서 운전할 때였다. 사거리에 좌회전 신호가 없는데 대기 차선에는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기다리는 차들이 있다. 가늠이 안되어 한 블록 더 가서 P턴으로 돌아다녔다. 현지 사는 친구를 만나 물어보니 '직진 신호 끝나고 노란 불에서 2대'라고 이야기를 해 준다. 암묵적인 합의에 의한 시스템이다. 해외 도시에서 이런 교통 시스템이 제대로 지켜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범칙금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신호위반이면 수십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한 번 위반했다 벌금을 물고 나면 스스로가 전도사가 되어 주변에 홍보하고 다니게 된다.
우리나라는 '양보' 표지판이 있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지키는 사람도 없다. 가장 우측 차선이 직진과 우회전이 함께 쓰는 경우도 있고 우회전 전용인 경우도 있다. 이것도 도로 위의 화살표를 보고 판단할 뿐 별다른 안내표지 같은 것은 보기 드물다. 시스템이 갖춰야 하는 요건중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일관성 아닐까?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도 아직 모자란다. 회전 교차로 통행방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길을 막는 사람이나 중간에 서서 다른 차에게 양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4 way stop' 같은 방식을 도입한다면 아수라장이 되기 십상이다.
루체른 호수를 따라 잠시 달리다 산길로 접어든다.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고 나니 다시 고속도로로 연결이 된다. 루체른 쪽으로 제대로 갔었으면 타고 갔을 그 고속도로이다. 길을 놓친 덕분에 30분 정도 도착 시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루체른 호수를 배로 건너는 즐거운 경험을 했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행운 덕분에 여행이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