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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재잡담

기운 내! 망치야!

잘못된 만남일지, 해피엔딩일지...

by 기타치는 사진가

나는 길고양이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산다. 내가 지내는 지하주차장은 아늑하다. 시도 때도 없이 차들이 드나들긴 하지만 차들이 마구 내달리는 큰길에 비하면 안전하다. 한여름에는 바깥보다 시원하고, 겨울엔 방금 들어온 차 엔진 위에 앉아 있으면 추운 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발톱 자국을 낸다고 싫어하는 모양이던데, 우리 고양이들은 그리 쉽게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싸울 때나, 발톱이 너무 길어 나무를 긁을 때나 가끔씩 드러낼 뿐이다.


여기엔 내가 먹을 밥과 물을 챙겨주는 인간들이 세 부류나 있다. 밥 줄 때면 꼭 망치라고 주문을 외우고 다니는 녀석들이 제일 후하다. 지난겨울엔 지하주차장에서 고양이 밥 주지 말라는 인간이 있어 추운 밖으로 나가 밥을 먹어야 했다.


인간이랑 살다가 길바닥으로 나온 녀석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친구들은 집에서 살 때가 좋았다고 푸념이다. 때 되면 밥 챙겨주고, 깨끗한 물도 항상 준비되어 있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화장실에 용변을 보면 집사가 정리까지 해 준단다. 심지어 아프면 병원이라는 곳엘 데리고 간단다. 신기하게도 다녀오면 몸이 편해진다고. 길에서 나서 자란 나로서는 믿기 힘들다. 벌레도 제대로 못 잡고, 쓰레기봉투 뒤질 줄도 모르는 집고양이들이 한심할 뿐이다. 게다가 녀석들은 어찌 된 일인지 짝짓기에 도통 관심이 없다. 무슨 짓을 당했기에…


망치족 인간들이 밥을 챙겨주기 시작한 게 지난봄부터였으니 이제 반년이 되어간다. 냄새나는 사료는 별로 맘에 안 들지만 캔이나 짜주는 간식은 정말 맛있다. 다른 족속들처럼 잠깐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제법 열심히 챙겨준다. 이 정도로 챙겨주면 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 밥만 먹고 나 몰라라 하는 몰상식한 고양이는 아니니까.


밥을 챙겨준 인간의 다리에 얼굴을 비벼본다. 인간들은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하기가 어려운지라 내가 좋아한다는 냄새로 표시를 해야 한다. 처음엔 흠칫 놀라다가 바로 좋다며 웃는 모습이 귀엽다. 며칠 지나니 얼굴을 대는 인사에 익숙해졌나 보다. 옆구리도 비벼준다. 인간도 손을 내민다. 무슨 짓을 할지 살짝 걱정이지만 등을 긁어주는군. 낮에 숲 속에서 벼룩에 물린 자리가 가렵던 참이다. 시원해진 김에 늘어지게 기지개도 켜본다. 이 인간들한테는 경계를 풀어도 될 것 같다.


망치족하고 인사를 튼 지 석 달이 되었다. 망치족 3인자인 젊은 암컷이 먹이 주머니를 들고 지하주차장에 나타났다. 망치족은 이인자 빼고는 모두 암컷이다. 나이가 많은 인간이 둘, 훨씬 어린 암컷 인간이 둘이다. 보통은 제일 서열이 낮은 어린 암컷이 다른 녀석을 데리고 나타나는데 오늘은 셋째 혼자다. 이 녀석은 아주 가끔 나타나서는 호들갑을 심하게 떨지만 캔 인심이 후해서 좋다. 사료하고 캔을 비벼서 준다. 캔만 주면 더 좋겠는데… 등을 쓰다듬는 인간의 손길을 느끼며 식사를 마쳤다. 오늘따라 유난히 심하게 쓰다듬어대지만 이젠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만큼 친해졌다는 이야기겠지.


어라, 이 녀석 봐라. 빈 그릇을 챙길 줄 알았더니 나를 덥석 안아 올렸다. 어이, 인간, 이건 아니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내려놓으라고. 할퀼까? 물까? 그간의 인연도 있는데 너무 심하게 다룰 건 아닌 듯하다. 어찌하려는지 조금만 지켜보자.


어어~~ 하는 사이에 셋째 인간의 영역까지 와버렸다. 음… 지하주차장 하고는 많이 다르다. 밝고 깨끗하다.


“망치야, 놀랬지? 나머지 가족들은 여행 갔거든. 오늘은 나 혼자니까 겁먹지 말고 편하게 있어. 푹신한 침대에 올라와 있어도 돼.”


셋째가 뭐라 중얼거리며 나를 내려놓는다. 푹신하다. 도서관 옆 잔디밭도 보드랍고 푹신하긴 했지만 차원이 다른 푹신함이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도 도통 모르겠다. 이거 참,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린 걸까?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인간은 어느새 옆에 나란히 누웠다. 발톱도 안 세우고, 털도 얌전한 걸 보면 나에게 나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일단은 안심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이 집사를 맡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한데 말이다, 집사는 내가 고르는 거라구. 난 아직 지하주차장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단 말이다. 내가 안 보이면 내 친구들은 얼마나 걱정을 할까? 작별 인사를 할 기회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니냐구. 역시나 인간들은 자기들 맘대로다. 게다가 난 아직까지 집고양이로 살 생각은 없다.


“엄마가 너 병원 데리고 가서 검진받고 오래. 금방이면 되니까 같이 다녀오자고.”


이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어디서 상자를 가져오더니 날 넣어 버렸다. 어딘가로 가는 모양인데, 캄캄한 상자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불안해진다. 가까이에서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짝짓기엔 도통 관심이 없던 집고양이 녀석들이 떠오른다. 설마? 나한테?


살짝 벌어진 상자 틈으로 다른 고양이의 냄새가 난다. 옆 동네 사는 치즈 녀석 냄새다. 여기서 더 멀어지면 곤란하다. 내가 어떤지 살펴보려는 건지 잠시 뚜껑이 열린 틈에 있는 힘을 다해 뛰어나왔다. 다행히 한 번에 상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셋째를 뒤로 하고 냅다 달린다. 일단 이 동네를 벗어나고 봐야겠다. 셋째 녀석이 따라서 뛰어 오지만 난 사냥 본능을 갖고 태어난 고양이다. 인간이 달려와 나를 잡을 수는 없다.


차들이 험악하게 내달리는 아주 큰길을 건너왔으니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않을 테지. 인간의 손을 탈출한 건 다행인데 친구도 없는 낯선 곳에서 영역을 확보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이 동네 고양이 놈들이 드세다고 하던데…


이 동네로 도망 온 지 이틀이다. 그 사이 텃세 심한 터줏대감 녀석들하고 몇 번을 싸워야 했고, 밥 찾아 먹기도 힘들다. 가까스로 밥그릇을 찾지만 텅 비어 있거나 겨우 사료 몇 알 남아있을 뿐이다. 제대로 배를 채워 본 지가 언제인지…


앗, 저 놈은 이 동네에서 제일 사나운 얼룩이 놈이다.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지금 먹고 있는 밥그릇 주인이 저 놈인 모양이다. 나한테 달려든다. 기운도 없는데 저 놈하고 싸웠다간 살아나기 힘들다. 무조건 도망이다. 냅다 뛴다. 눈앞이 번쩍하고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싶더니 끼익 하면서 시커먼 자동차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까딱하면 차에 치일 뻔했다. 저 쪽에선 얼룩이 놈이 지 밥그릇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서 피해야겠다.


이게 어쩐 일이지? 뒷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허리 아래로 뻐근하게 아파온다. 가까스로 다리를 질질 끌어 안심할 수 있는 풀숲으로 몸을 피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참기 힘든 아픔이 밀려온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리 쪽을 차에 깔린 모양이다. 이를 어쩐다?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일주일이다. 꼼짝 못 하고 풀숲에 숨어 있었지만 여전히 뒷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허벅지 살은 짓이겨졌다. 그 틈으로 오줌이 새어 나오는지 냄새도 견디기 힘들다. 이대로는 얼마 더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 이왕 죽을 거라면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자. 낯설고 험한 여기서 내 삶을 끝낼 수는 없다. 어쩌면 그냥 집고양이의 삶을 받아들이는 게 나았겠단 생각도 들지만 이미 한참 늦어 버렸다.


가까스로 지하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큰길을 건너면서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른다. 그나마 여기서 죽을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아직까지 다른 녀석이 지하주차장을 차지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제 인간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 몸을 뉘여야겠다. 길진 않았지만 재밌게 살았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낯익은 발걸음이 들려온다. 이 걸음소리는… 망치족 수컷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 남은 힘을 쥐어짜서 앞으로 나선다. 어이, 인간, 나 좀 도와줘… 제발…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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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주차장 고양이 망치는 동물병원에서 요도 재생 수술을 받고 회복 중입니다. 다행히 뒷다리는 크게 다치지 않아 생활하는 데에 크게 지장은 없을 듯합니다. 망치족들은 망치가 퇴원하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망치를 위한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집으로 들어올 때만큼이나 설레고 분주합니다. 망치가 건강하게 되돌아올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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