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 년의 시간이 머물러 있는 곳, 그 시간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강바닥에 자리 잡은 커다란 바위 위에 물에 쓸려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자리 잡는다. 바위 위로 타넘는 물은 돌멩이를 흔들어 대지만 돌멩이는 살짝살짝 진동만 할 뿐 휩쓸려 가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커다란 바위 위에 자그마한 흠집을 낸다. 이윽고 큰 비가 오면 돌멩이는 하류로 휩쓸려 나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또 다른 돌덩어리가 그 자리에 밀려 올려진다. 돌멩이가 자리 잡고 비틀거리면서 틈바구니는 조금씩 커지고, 오랜 시간 돌멩이를 흔드는 물길로 그 자리는 접시처럼 갈려 나간다. 자그마한 접시는 어느덧 웅덩이로 커졌다. 그 웅덩이에 흙과 광물을 잔뜩 머금은 강물이 고이고, 다시 말라 쇳물의 깨진 동그라미를 그린다. 쨍한 햇볕에 미처 마르지 못한 물은 그 동그라미의 색을 더욱 진하게 채색한다.
짧으면 수만 년일 테고, 길게는 수십억 년의 세월, 사람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 요선암에 있는 돌개바위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연유일 것이다. 무채색인 바위들이 계절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제각각의 형태로 변화한다. 갈 때마다 물 색도 달라지고 바위 색도 달라진다. 물이고 바위고 본래 가지고 있는 색이 달라질 리야 없겠다만 바위에 쌓이는 흙먼지가 달라지고, 물에 흘러 내려오는 먼지의 색이 달라지는 탓이다.
결국 사진은 사물을 찍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시점의 사물에서 반사된 빛을 담는 것이다. 그 빛은 대기를 통과하면서 수분에 의해 굴절되기도 하고, 산란되기도 한다. 같은 계절, 같은 시간이라도 같은 빛은 없다. 다른 계절, 시간 대의 요선암이 늘 궁금하다. 석양에 비친 바위들은 어떤 색일지, 노을이 스며든 강물은 어떤 색을 보여줄지... 달빛에 비친 바위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사진가들이 요선암에 매료되는 이유일 것이다.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관광객들이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 온다. 뭘 찍고 있는지 궁금한 게지. 갯바위의 낚시꾼 그물망에 어떤 물고기들이 잡혀 있는지 궁금한 것과 마찬가지. 정작 옆에 와 봐야 저 쪽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물과 돌이다. 어떤 분들은 살짝 물어보기도 한다.
"저, 실례합니다만 뭘 찍고 계신 건가요?"
낚시꾼들에게 배운 게 있다.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나름 진지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은 마뜩지 않은 모양이다. 수고하시라며 총총 사라진다. 사진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저 놈이 저기서 뭐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일 테지. 셔터를 열심히 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멍하니 물 흐르는 것만 바라보는데, 이따금씩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면 도닦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100년도 채 안 되는 사람의 시간 앞에 펼쳐진 억년의 작품. 그 작품의 시간을 오롯이 사람의 시간으로 담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요선암의 사진 중에 장노출 사진이 많은 이유이다. 사람이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간으로 시간의 작품을 담아 보기 위해 요선암에 갈 때는 꼭 ND 필터를 챙겨간다. 20초에서 30초 정도 셔터를 열어 놓고 있으면 개울물의 물줄기나 물거품은 흰 그림자로만 남게 된다. 순간적인 움직임은 사라지고 바닥의 요철이 무뎌진 모습으로 물 표면에 드러난다. 그 자체로의 물과 바위의 모습이 이런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피사체의 시간, 사람의 시간, 사진의 시간... 전혀 다른 시간 프레임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사진의 묘미가 있다.
굳이 요선암을 보기 위해 찾아 가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영월에 갈 일이 있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일 뿐, 실제 그닥 대단한 볼거리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 가 볼 생각이라면 땡볕이든, 찬 바람이든 야외에서 버틸 채비를 든든히 갖춘 다음 진득하니 자리 잡고 물소리도 듣고, 새소리도 듣고, 바위에 새겨진 시간의 이야기도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
요선암의 매력은 디테일에 숨어 있는 시간의 자락을 살포시 펼쳐 보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