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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사진가 Aug 12. 2015

[내가 사랑하는 출사지 #5] 임진각 바람의 언덕

지금은 사라진 조형물에 대한 추억

  선선한 가을 밤에 시작한 작업인데 이제 밤이면 제법 차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조금 남았지만 임진각의 밤은 춥다. 허허 벌판이라 바람도 차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멀리까지 와서 사랑을 속삭이는 차들만  한두 대 서 있을 뿐. 얼마 전만 해도 서늘한 가을 밤을 느끼려 산책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는데, 2-3 주 사이에 이 곳은 벌써 겨울이다.


  10시가 넘으니 공원을 밝히던 조명이 꺼진다. 주변이 어두워 지면 하늘의 별은 더욱 빛난다. 어느새 오리온 자리가 저만큼 올라와 있다. 고요한 밤, 바람 소리만 들려온다. 바람의 언덕에 설치되어 있는 깃발로 인해 바람 소리는 더욱 저음으로 바닥에 깔린다. 흐드러지게 깔려 있는 바람개비에서는 높은 음의 바람 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와 내  숨소리뿐이다. 그러고 보니 숨소리 역시 바람소리.


  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를 얹는다. 서두를 것 없다. 이 어둠이 사라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사진 한 컷 찍는데 1-2분이면 충분하다. 릴리즈를 걸어 카메라가 버틸 때까지 셔터를 열어 놓는다고 해도 5분이다. 릴리즈까지 끼워 놓고 무엇을 찍을까 생각에 잠긴다. 바람도 좋고, 어둠도 좋고, 구름도 좋다. 바람개비의 회전과 구름의 흐름, 깃발의 펄럭임, 별의 흐름.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몇 년 전, 어느 화창한 가을 주말, 모처럼 우리 집에서 가족들이 모였다. 점심을 먹고, 임진각 바람의 언덕에 가서 연을 날리기로 했다. 마침 며칠 전 코스트코에서 사왔던 커다란 독수리연도 있었고, 아직 꼬맹이를 키우는 처제네도 차에 연을 싣고 왔단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람의 언덕은 생각보다도 훨씬 한가하고 좋았다. 곳곳에 아직은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도록 파라솔도 설치되어 있었고, 가파르지 않은 언덕은 꼬마들이 놀기에 적당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수 놓은 연들의 향연 역시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가지고 갔던 연들 역시 잘 날아 주었고, 아이들은 신나 하며 연을 날리고 놀았다.


  꼬마들 사진 찍어 주던 내 눈에 띄었던 것은 바람의 언덕에 설치되어 있던 작품이었다. 송운창이라는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인 '분다'. 3-4미터에 이르는 하얀 깃발들이 수도 없이 언덕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펄럭이는 모습이 마치 한풀이 춤을 추는 무당의 긴 소매자락처럼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 날 밤, 저녁 먹고 다시 카메라를 챙겨 혼자 임진각으로 향했다.






  시리도록 푸르던 가을 하늘은 어느덧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어 있었고, 오리온 자리 밑으로 떠오르는 시리우스 마저 높직한 하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계의 행성을 제외하고는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 시리우스라던데, 역시나 눈에 확 들어온다. 카펠라와 알데바란 등 겨울의 대육각형도 쉽게 찾아진다. 눈이 어둠에  익어갈수록 별의 수는 많아진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저리도 화려하게 반짝이는 모습도 오랜만이다. 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이용하여 북극성을 찾는 방법도 떠올려 본다. 생각보다 북극성이 오른쪽으로 치우져 있다. 어쩐지 오리온자리가 떠오른 방향이 좀 낯설다 싶더니. 바람이 한 자락 불어오면서 깃발들이 살포시 나부낀다. 하늘 저편으로 가 있던 내 시선을 다시 땅으로 끌어내린다. 그래, 사진 찍으러 왔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두어 시간 사진을 찍는 동안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보이지 않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어느 공간에 오롯이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 쉽지 않은 경험이다. 의도하지 않았던 홀로의 경험은 당혹스럽다. 예전 미국의 사막 지대를 돌아다닐 때 마주 오는 차도 없고, 뒤따라 오는 차도 없이 2시간을 혼자 운전했던 적이 있다. 360도 끝 간 데 없이 펼쳐 있는 수평선 안쪽으로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나 밖에 없던 경험.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사는 것에 익숙했던 나에겐 무섭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아주 생경한 경험이었다. 집에서 20분 떨어진 곳에서 또다시 혼자 있음을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 공간을 가득 채운 거대한 예술 작품을 오롯이 혼자서 느낄 수 있었던 시간, 바람과 별과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의 기억, 사진 몇 장으로 남기기에는 벅찬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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