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라보던 언덕에서 일본을 본다
히로시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자폭탄을 맞은 도시, 나가사키는 규슈 서쪽에 있는 인구 45만의 자그마한 도시이다. 후쿠오카에서 기차로 두 시간, 바다를 끼고 달리는 기찻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보통 규슈 패키지여행에는 나가사키 옆 사세보시에 있는 하우스텐보스가 1박 코스로 포함되어 있을 뿐 나가사키가 포함되어 있는 패키지는 흔치 않다. 그러다 보니 나가사키는 우리에게는 이름만 익숙할 뿐이다.
애초에 히로시마 다음으로 원폭을 투하하려 했던 곳은 히로시마와 그리 멀지 않은 기타큐슈의 고쿠라였다. 두 곳 모두 전쟁에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던 공업 도시. 팻맨(원자폭탄의 이름)을 싣고 발진한 B-29 복스카는 1차 목표지였던 고쿠라 상공에 도착하지만 구름 때문에 조준이 불가능했다. 결국 복스카는 기수를 나가사키로 돌렸고 죽음의 버섯구름은 나가사키에서 피어오르게 된다.
나가사키를 처음 찾을 때, 왠지 우울한 느낌일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었다. 하지만 노면 전차들이 다니고, 여기저기 카스텔라와 짬뽕집 간판이 늘어서 있고, 종려나무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거리 풍경을 보면서 이내 선입견은 사라져 버렸다. 차분하지만 맑고 경쾌한 도시, 나가사키의 첫 인상이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있는 주택가와 한 발만 내디디면 풍덩 빠질 듯한 바다는 부산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1천 엔짜리 노면 전차 1일 자유 이용권을 구입하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구라바엔. 나가사키 중앙역 앞 노면전차 정류장에서 전차를 타고 중간에 한 번 환승해서 서너 정거장 가면 이내 전차 종점이다. 종점에서 표지판을 보고 찾아가면 바로 구라바엔이다. 19세기 이 곳에 머물던 영국인 Glover 씨의 저택과 주변에 모여 살던 외국인들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곳이다. Glover 씨가 일본에 와서 구라바 씨로 불리고 있다는 걸 그의 후손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구라바엔은 한적한 주택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찾아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가한 금요일 오후, 골목에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요즘 서울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 되어 버린 듯하다.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자전거와 스쿠터의 모습들이 역시 일본임을 확인해 준다.
규슈 남쪽으로 갈수록 개화기 일본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일본 역사에는 까막눈이지만, 도쿄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당히 독립되어 있었고, 중국까지 왔던 무역선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나가사키와 가고시마 등 규슈 남쪽의 도시들은 일찍부터 서구 문물에 접해 왔다고 한다. 시코쿠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가 지금의 가고시마 지역인 사츠마 출신 사족들과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근대 일본의 기틀을 세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나가사키는 일본 최초의 개항으로서 일본의 근대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가 자리하고 있다.
[Thomas Blake Glover, 1838~1911, 구라바엔 홈페이지에서 발췌, 번역]
스코틀랜드 출신 글로버는 1859년 21세의 나이로 나가사키의 개항과 동시에 일본에 입국하여 글로버 상회를 설립한다. 막부의 격동의 시대에 의인들을 숨겨주고, 지원해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경제인으로서 일본의 근대 과학 기술의 도입에 공헌한 바가 크다.
구글링을 하다 보니 글로버의 역할은 생각보다 컸던 듯.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 유학을 돕기도 하고,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운양호 역시 글로버가 수입해 들여온 것이라고 하니, 이 양반이 나가사키가 아닌 군산이나 부산쯤에 터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도 잠깐 해 본다. 각설하고, 구라바엔에서 바라보는 나가사키의 경치는 절경이다. 이런 풍광 좋은 곳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급격하게 성장해 가는 신생국가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자기 사업의 이권도 짭짤하니 챙겼을 미스터 글로버의 인생이 참 부럽다.
구라바엔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이기도 하다. 글로버의 부인은 늘 팔에 나비가 새겨진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고 하는데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이야기와 함께 오페라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 구라바엔의 정원에는 작곡가 푸치니의 동상과 나비부인의 주인공을 맡아 일본 성악가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미우라 타마키라는 오페라 가수의 동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냥 아름답고 경치 좋은 관광지라고 하기엔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질수록 여행의 보람과 재미는 커질 수밖에 없다. 가이드의 수박 겉핥기 설명만 듣고, 손가락 브이 사진 몇 컷 찍고 서둘러 떠나는 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아쉽고 답답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실과 안방 베란다에 다육식물을 잔뜩 키우고 있는 아내는 글로버 씨의 온실이 어지간히 탐났던 모양이다. 집에 와서도 온실 타령이다.
오후 내 걷고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구라바엔 안의 찻집을 찾았다. 카스텔라와 조각 케이크 세트를 시켰다. 나가사키에서 카스텔라를 안 먹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카스텔라도 맛있었지만 구라바엔의 풍경을 그려 넣은 도자기 컵이 더욱 눈길을 끈다. 언덕 위의 저택에서 바람을 잔뜩 안은 범선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19세기의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물론 이 컵은 출구 바로 전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도 판매한다. 참, 커피맛 역시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