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에 보존되어 있는 19세기 외국인 거주 지역
오란씨도 아니고, 오란다가 뭐래? 일본식 영어를 익히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오란다... 힌트는 나라 이름이다. 유럽에 있는 나라. 크지는 않지만 축구는 제법 센 나라.
정답은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홀랜드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오란다로 바뀌었다. 일본은 늘 이런 식이다. 멀쩡한 영어를 자기들 맘대로 바꿔 놓고는 그래도 외국어라고 가타가나로 표기한다.
오란다 언덕은 나가사키 시내 중심가에서 살짝 외곽으로 비켜 있는 양지바른 언덕이다. 일본 유일의 개항으로 외국과의 무역의 중심이었던 나가사키에서 19세기 무렵 네덜란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고, 이 건물들은 잘 보존되어 이런저런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가로운 오후 햇살이 비추고 있는 오란다 언덕은 시간 많은 여행자 부부가 한가로이 거닐기에는 안성맞춤의 공간이다. 아직 겨울의 쌀쌀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목련은 이미 봄을 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꽃을 피운 성급한 벚나무도 보인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굳이 눈을 마주치시길래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넨다. 이 곳의 유래부터 이웃한 차이나타운과 그로버가든에 관한 이야기, 중국인의 전족에 관한 이야기 등등. 익숙하지 않은 나가사키 사투리가 부담스러워 괜스레 바쁜 척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인사가 능숙하면 말도 잘 알아듣는 줄 안다.
일본은 산이 높고, 바다로 막힌 곳이 많아 지역 간의 교류가 빈번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입지를 유지해 왔고 이로 인해 지역 별로 사투리가 심하다. 심지어 같은 규슈인데도 후쿠오카 사람과 나가사키 사람의 말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몇 마디 대화만 나눠 보면 어느 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니...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에 마련된 이런저런 전시관들을 기웃거려 본다. 앞서 가는 아가씨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보니 아마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시간이 남아 들른 모양이다. 이 곳은 사카모토 료마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가를 기념하는 곳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빠지지 않는 존재이며 지금도 일본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인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로 따지자면 안중근의사와 이순신 장군을 합한 정도? 료마가 머문 집도 아니고 료마의 사진을 찍었다는 것 만으로도 사진가의 기념관을 만들 정도라니. 아무튼 이 곳에는 사진가의 카메라와 여러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사진의 원리, 카메라의 역사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또한 100여 년 전의 나가사키 모습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크지 않은 전시공간이지만 참 꼼꼼하게 꾸며 놓았다.
"우리 집에선 도대체 잘 크지 않는 녀석들이 여기엔 길거리에 널려 있네."
다육식물을 좋아하는 아내의 탄식을 들으며 각자의 관심에 따라 이리도 보는 것이 다를 수 있구나 싶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도 종종 보이던 놈들이 길섶에 자라고 있다. 근데 집에 있는 놈들보다 훨씬 크고 튼실하다.
네덜란드 언덕이지만 일본은 일본이다. 양지바른 곳에 자그마한 사당이 있고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복을 빌고, 교회처럼 지은 결혼식장에서 신부 복장을 한 외국인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는 일본인들에게 신은 무조건 많으면 좋은 것이다. 굳이 하나만 믿겠다고 강요할 필요 없다. 이 신한테도 빌고, 저 신한테도 빌고, 아무나 들어주면 고마운 것이다. 물론 일본인들이 이처럼 단순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한 게 일본인들의 종교 인식이다. 아무튼 한가로이 산책 중인 여행자가 떠들기에는 무리스런 주제임은 분명하다.
오란다 언덕은 나가사키 중앙역에서 노면전차로 서너 정거장이면 도착할 수 있다. 중간에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노면전차의 매력도 일본에서 즐길 수 있는 재미 중의 하나. 오란다 언덕과 함께, 이 곳을 지나 만나게 되는 그로버엔은 일본의 근대 역사에 대한 좋은 참고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