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
카메라의 원리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일찍 알려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바늘구멍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을 뿐 아니라 17세기부터는 화가들의 데생 도구로 사용될 정도였으니.
이렇게 상을 비추는 장치와 빛을 저장하는 감광물질을 통해 이미지를 저장하는 방법, 즉 사진을 발명한 것이 19세기였다. 초창기 카메라와 사진은 그다지 크게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우선 몇 시간이나 소요되는 터무니없는 노출시간도 그렇고 단 한 장의 이미지밖에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솜씨 좋은 화가가 쓱쓱 그려내는 그림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술의 발전에 따라 노출시간도 짧아지고 대량 복제의 기술도 발명되면서 기존의 회화 시장에는 커다란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약삭빠른 화가들은 사진가들을 고용하여 베껴 그릴 사진을 찍어 오도록 시키기도 하고, 사진 보다도 더 똑같이 그림을 그려내겠다고 수련을 시작하는 화가도 있었다. 상당수의 화가들은 아마도 절망과 패배의식으로 술독에 빠지기도 했었을 테지. 세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메라라는 게 등장해서 아무나 실제의 이미지를 손에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진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회화분야에서는 갑론을박이 치열해졌다. 사진이 따라올 수 없는 회화의 영역이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 부류, 사진 따위는 예술이 아니라는 원론적인 부정파, 직접 돌아다니지 않고 사진을 보고 베껴 그려 내다 파는 실속파까지 다양한 의견들과 행동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철저히 무시하기도 하며 세상의 변화를 겪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상파다. 이전의 화가들이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 몰두하던 것을 과감히 내던져버리고 자신의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 사진으로는 느낌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인상파의 출발점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할 때 사진은 인상파를 시작으로 회화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되었고, 또한 사진 역시 회화의 중요한 한 분야로 편입되게 된다. 지금으로 본다면 평화로운 정반합을 이룬 셈이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사진 이전의 회화보다 훨씬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회화의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계기로 인공지능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는 지금, 카메라와 사진의 역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사진뿐 아니라 자동차, 트랜지스터, 전파통신 등 여태껏 인류의 모든 발명이 비슷한 과정을 겪어 왔으리라. 지금까지의 경험상 새로운 발명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파괴로만 끝나는 것은 영속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재 기반마저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새로운 발명은 기존에 없던 무엇을 창조해낸다. 이 창조는 발명품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들어낸 발명가 조차도 이 새로운 창조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새로운 존재에 대해 두려움 없이 접근하는 사람들, 기존의 삶에 응용하여 좀 더 나은 무엇을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의 집합적인 노력에 의해 세상은 변화한다.
우리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측면에서 알 파고는 이미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업무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는 컴퓨터, 스마트폰의 형태로 말이다. 사진으로 치자면 아직까지는 단 한 장의 사진만 생산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 대량 복제가 가능한 사진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일거리를 빼앗기는 사람, 약삭빠르게 이용해 먹는 사람, 새로운 무엇을 창조해 내는 사람 등등 다양한 인생들이 펼쳐지겠지. 딥마인드를 만든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우리 모두의 인생은 새로운 길을 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는 결국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