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중년의 동네 단골 맥주집 이야기
'Soul & Groove'라는 간판과 입구에 적혀 있는 '수제 맥주', 음악 좋아하고 맥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방앗간이다. 여차 저차 하여 주말부부 생활을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동네 탐색은 거의 끝나갔다. 서리풀공원으로 해서 서래마을 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6-7킬로미터의 산책코스, 예술의 전당의 포켓 스탑들, 깔끔해 보이는 미용실 등등 혼자 며칠을 지내는데 필요한 정보들은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마지막 남은 탐색은 어쩌다 맘 편하게 혼자서도 갈 수 있는 맥주집이었고, 예의 소울 앤 그루브는 아주 적당해 보였다.
가볍게 저녁을 챙겨 먹고 유튜브 동영상 몇 개 챙겨 보고, 기타 좀 만지작거리다가 밖으로 나섰다. 조심스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기대와는 달리 (뭘 기대했을까?) 내 또래 혹은 위로 보이는 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메뉴판을 보니 에일맥주가 눈에 띈다. 한 잔 주문하고 가게를 둘러본다. 곳곳에 걸려 있는 포스터들을 보니 음악적 취향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나 우리 세대라면 공감할 수 있는 아티스트들이다. 롤링스톤스, 비틀스 등등...
다른 손님은 아직이다. 저녁에 소주 한 잔 하고 2차 오기에는 살짝 이른 시간이기는 하다. 쥔장에게 말을 걸어 본다. 근데 이 아저씨 은근히 숙맥이다. 나보다도 더 수줍어한다. 가게에서 판매하는 수제 맥주는 플래티넘이라는 국내 브랜드이고, 페일 에일과 골드 에일 두 가지가 있다. 원래 좀 더 다양하게 생산을 하는데 관리가 어려워 대표적인 두 가지만 판매한다고. 학번은 나보다 하나 아래고, 대학 때 잠시 학교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쳤지만 졸업하면서 손을 놓았다고. 역시나 음악에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2차로 한 팀이 들어오면서 쥔장은 메모지와 필기구를 건네주고 주문을 받으러 옆 테이블로 떴다. 우리 세대라면 빤한 곡들, 빌보드 팝 차트와 락 차트, 월간팝송의 표지에 등장하던 곡들을 네댓 곡 적어 쥔장에게 건넨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영상은 화질 구리고 촌스런 펑키 패션의 70-80년대 화면이거나, 깔끔한 화면에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의 모습이다. 강력한 비트의 하드락 뮤지션이라고 해서 세월이 비켜가는 일은 없는 법이다. 조금 씁쓸하고 서글퍼 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맥주 한 잔 하면서 즐길 수 있다는 데에 만족한다.
반년쯤 지난 요즘, 아직도 손님들로 북적거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두어 팀이 번갈아 가며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하고 같이 즐기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다행히 쥔장이 그리 매상에 초조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맥주 맛도 그대로이고 날씨가 더워지면서 더욱 시원하게 넘어간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신청하지 않아도 쥔장이 알아서 틀어주기도 한다. 이따금씩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알게 된 젊은 친구들의 싱싱한 모습을 깨끗한 화면으로 즐기기도 한다. 록음악은 언제나 살아 있다. 내가 잠시 잊고 살았을 뿐이다.
쥔장은 아직도 과묵하다. 이따금씩 서로 말을 꺼내기는 하지만 50대 초반의 아재 둘이서는 긴 대화가 이어지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음악만으로도 서로 흡족하니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 나이에 좋아하는 음악과 맛있는 맥주를 바로 집 근처에서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