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모든 순간을 끌어안는다

by 셩혜

얼마 전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책 한 구절이 유독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안방에서 분주하게 하던 일을 멈추고 부엌에 놓인 라디오 앞으로 쪼르-륵 달려와 가만히 서서 흙처럼 거칠지만 진한 향이 밴 디제이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세웠다.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 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느 책 속 문장이다. 코너 특성상 마지막에 책 제 목을 소개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코너 후 선곡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라디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디제이 목소리를 통해 소개된 문장은《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라는 책 중 한 문장이다. 휴대폰에서 바로 검색해 주문했다. 오전에 주문하면 오후에 배송되는 빠른 시스템 덕분에 ‘몇 시간 뒤면 읽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하고 하던 일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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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글쓰기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딱히 없다. 학교 다닐 때는 수업 과제 중 하나였고, 취업해서는 업무 중 하나였다. ‘~중 하나.’ 일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없던 일이다. 글쓰기로 통장 잔액을 채워 가기 시작한 건 사보를 제작하는 회사에 들어간 이후이다. 글을 쓰고 사보를 만들면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글을 잘 쓰건 그렇지 않건 클라이언트만 만족시키면 되는 글이었다. 철저히 클라이언트 입장을 대변하는 글인 셈이다. 진행하는 기관과 기업에 관한 정보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지만 공들여 쓴 글이 결국 내 것이 아닌 클라이언트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속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감하면 지쳐서 하루 이틀쯤은 멍하다. 몸에서 뭔가 훅하고 빠져나간 느낌이다. 정직원에서 프리랜서로 고용 신분을 변경한 뒤로도 마찬가지였지만 소속감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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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시간을 내어 돈과 상관없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글로 쓰다가 막상 나에 관해 쓰려고 하니 멈칫하게 되었다. 새하얀 백지 위 깜박이는 검은색 커서가 ‘안 쓰고 뭐 하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혼자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 친구가 만든 작업실 모임에 나갔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 모여 쓰니 뭐라도 쓰게 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글 중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업로드한 글만 어 느새 백 편. 돈과 관련 없는 글을 쓰다 보니 통장 잔고는 줄었지만 내 글을 응원해 주는 에너지원은 늘어났다. 여행을 오래 기록해 두고 싶어서 쓴 글은 누군가의 여행 길라잡이가 되었고, 일상 속 에피소드는 누군가에 게는 공감을, 또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건넸다. 주머니는 조금 가벼워졌을지언정 마음만은 뿌듯했다. 쓰면 쓸수록 쓰고 싶은 소재들이 생각났고 한 편 한 편 탈고할 때마다 정신적으로 풍족해진 느낌이다. 어떤 소재든 글 쓰는 것이 하루를 뿌듯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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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배송으로 내 손에 들어온 책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는 편집자 출신 작가 조안나가 펴낸 ‘작가 일기’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이야기에 공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책 제목만큼은 크게 공감했다.


언젠가 쓴 글 중 하나의 소재가 ‘아빠의 죽음’이었다. 부고한 날을 기준으로 그간의 부녀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초반 도입은 도저히 다른 사 람과 함께 쓸 자신이 없어서 혼자 오롯이 다섯 편 정도를 풀어냈다. 모임에서 함께 쓸 수 없었던 이유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자신이 없어서다. 그 다섯 편 이후의 이야기는 모임에서 이어 나갔다. 아빠의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가진 가장 깊은 슬픔도 글로 풀어내니 ‘시간’이라는 치료제보다 훨씬 더 좋은 치유제가 된다는 걸. 작가는 책을 통해 “쓰기가 만들어 낸 일상은 그 어떤 것보다 빛났다. 그것이 밝든 어둡든 간에 모두 다 끌어안게 된다.”라고 말한다. 맞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듯 누군가의 인생을 닮은 글도 그렇다. 별것 아닌 일상과 순간의 기억이 좋을 수만은 없고, 모든 글이 해피엔딩일 수도 없다. 글을 나누다 보면 좋은 일은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슬픈 일은 마음의 무게를 줄인다. 모든 순간은 글쓰기가 되고 글은 모든 순간을 끌어안아 오래도록 빛나고 선명하게 한다. 그래서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본 원고는 2W매거진에 기고된 글입니다. 2W매거진은 매달 전자책으로 발행되는 여성 에세이 웹진입니다. 2W매거진에 필진으로 참여하세요. 하나의 주제 글쓰기로 함께 글쓰는 재미, 피드백을 나누며 공감하고 사고를 확장해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제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글을 기고할 수도 있고요. 새로운 소식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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