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셩혜 Sep 14. 2018

약속의 땅, 하와이

약속의 땅, 하와이

소박해서 더 특별한 나필리 비치(Napili Beach) 


“다음번에 마우이에 오면 이쪽으로 숙소를 잡으면 좋겠어”   

  

남편이 말했다. 한낮의 더위가 물러선 나필리 비치, 그늘을 만들어 주는 한 그루 나무 아래 누웠다. 늦은 오후라 조용한 분위기 속에 불어오는 파도 소리를 듣기도, 바람을 맞기도 좋았다. 눈앞으로 보이는 몰로카이 섬도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나필리 비치를 바로 앞에 둔 몇몇 리조트는 내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특별한 부대시설이라고 작은 수영장뿐이고 조경이라 할 만한 건 깨끗하게 정돈된 보드라운 잔디가 전부다. 비치 체어에서 책을 읽는 사람도 태닝을 하는 사람도 모두 제각각의 포즈지만, 표정만은 한결같이 평온해 보인다. 

3년 후 남편과 함께 그가 말했던 호텔에 체크인했다. 한 건물에 10개 남짓한 방이 있을 만큼 작은 건물 세 동이 전부인 나필리 선셋 비치프런트 리조트(Napili Sunset Beach Front Resort). 외부에서 봤을 때 기대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숙소에 대한 느낌과 바로 앞 나필리 비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주차 후 체크인을 위해 프런트 오피스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리조트 간판 맞은편 건물에 있다는 프런트 오피스 방향 표시 등 앞에 하필이면 큰 트럭이 주차되어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우물쭈물 서성거리는 우리를 구해준 건 한 모녀이다. 리조트 이름을 말하며 오피스를 찾는다고 하니 갑자기 앞 건물 라나이에 있던 중년을 향해 “Hey”라고 소리쳤다. 눈뜨고도 장님이라고 하는 말처럼 그 중년이 머물고 있던 건물이 바로 프런트 오피스가 있던 곳이다. 덕분에 체크인을 마쳤다.     


 ‘114’라고 적힌 묵직한 갈색의 나무문은 마치 흑백 영화 속에나 볼법했다. 수하물을 옮기는 남편을 뒤로하고 아날로그 방식의 오래된 열쇠로 문을 열었다. 원베드룸이라 구경할 것이 많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다. 소박했지만 작은 살림집처럼 부엌에 구비된 그릇, 식기, 냄비는 완벽했고 충분히 몇 달이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로 된 가구가 놓인 거실도 하와이 하와이스럽다. 벽에 걸린 그림이며 소파 페브릭까지. 하지만 그렇게 감탄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거실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은 서둘러 창문을 열게 했다. 

한국으로 치면 베란다로 불리는 라나이가 창 너머에 있다. 문을 여니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다. 빨갛고 노란 꽃, 붉은 티(ti)와 히비스커스가 핀 화단이 있고 그 앞에 아름드리나무가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나무 옆 비치 체어는 바다를 향했고, 손을 뻗으면 비치가 손끝에 닿을 듯하다. 다른 객실과 달리 우리가 배정받은 114호를 지키는 건 아담한 2층 건물을 보듬을 만큼의 큰 나무였다. 나무는 양옆으로 펑퍼짐하게 자라났고 풍성한 잎사귀를 가졌다. 얼마나 오래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한 아름에 안을 수 없다. 이 나무 한 그루가 주는 분위기와 정서적 느낌은 무척이나 컸다. 넋 놓고 감상에 빠진 사이 남편이 다가와 몇 해 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배꼽시계가 울린다. 라나이 테이블에 근사하진 않지만 포장해온 요리를 세팅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눈앞에 두고 식사를 마쳤고, 이 상황에 심취한 채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눴지만, 거센 파도 소리에 들리지 않아 포기하고 같은 곳을 바라만 본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해가 모습을 감췄고, 어둠이 찾아온 바다의 조명이라곤 비치 앞 몇몇 리조트의 불빛뿐이다. 라나이에 있던 투숙객들이 바람을 피해 객실 안으로 모두 들어갈 때까지 우린 조용히 밤바다를 즐겼다. 공간을 채우는 건 숨소리마저 잠재우는 우람한 파도 소리와 하늘의 별까지 감춘 구름이 전부이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곤히 잠들 수 없던 밤. 몇 번이나 뒤척였고, 그러는 사이에도 파도는 쉬이 잠들 줄 몰랐다. 모른척하며 ‘밤새 잘 있었어!’ 하고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라나이로 서둘러 움직였다. 아침이 되어도 바뀌는 건 달리 없다. 우기에서 건기로 바뀌는 때라 그런지 몸에 스치는 바람은 찼고 파도는 숙소를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거침없다. 먹구름은 여전히 눈앞에 가득하고 멀리 보이는 몰로카이 섬은 모자를 쓴 것처럼 구름에 갇혔다. ‘첨-펑 처~~러렁 휘익 휘익 챠르르 스-으.’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짙은 물결이 하얀 거품으로 부서진다. 부서지면서 조차 또 한 번의 작은 웨이브를 만들어내고 그 웨이브 안쪽으로 회오리바람이 공간을 휘감는다. 모래사장 가까이 밀려드는 이 모든 것이 모래와 하나 되니 마치 휘핑크림 가득 올라간 모카커피 같다. 

나도 옆집 부부도, 산책을 즐기는 노신사도, 청소 중이던 메이드까지. 모두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높은 파도가 신난 아이들과 이 파도가 반가운 서퍼들만이 아침 비치의 주인공이다. 비치 체어에 앉아 향긋하게 내린 커피 한 잔으로 온기를 채운다. 모래사장을 산책하는 이들과 주고받은 인사 속에 아침의 여유가 느껴져 좋다. 

3년 전 이곳에서 나눈 약속은 지켰지만, 그날과는 전혀 다른 색의 날이다. 모든 날, 모두의 날씨가 좋을 수도 같을 수도 없다. 흐린 날도 그런대로 괜찮다. 이런 글루밍함도 또한 나쁘지 않다. 오롯이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니 이렇게 훌륭한 악기가 따로 없는 듯하다. 완전 방음 따위가 어색할법한 이 리조트의 며칠은 완벽한 모습을 자랑하는 고급 리조트보다 훨씬 더 그림 같은 날을 선물했다. 반짝이진 않았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모습으로 오래도록 말이다. 소박해서 더 특별했던 나필리 비치의 풍경과 운치는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채 오늘 추억이 되었다. 


글. 사진 박성혜 

하와이 여행 가이드북 <오! 마이 하와이> 저자.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프리랜서 에디터.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