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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Sep 30. 2018

하와이 맥주, 마법을 부리다.

하와이 맥주마법을 부리다.

진하고 씁쓸한 잔향 


“캬-아. 맥준 생맥이 진리야!”     


기내에서 한숨도 못 잤다는 남편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내리 네 시간을 잤다. 몇 번이나 일어나려 애쓰는 듯했지만 잠에 취한 사람처럼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억지로 깨워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어 기다렸다. ‘일어날 만한 하면 일어나겠지 뭐!’      

그렇게 숙소를 나온 건 레스토랑과 펍의 해피아워가 시작될 즘이다. 어디를 특별히 가야 한다는 곳도, 봐야 한다는 것도 의무감이나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자석에 이끌린 듯 칼라카우아 거리에 도착했다. 서울의 명동처럼 다양한 나라의 언어가 공기를 채운다. 하늘을 캔버스 삼는 야자수는 바람을 품었다. 일방 통행인 도로는 클랙슨 소리 대신 흥겨운 음악 소리를 뿜는다. 우리처럼 거리를 서성이는 여행객은 많았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이리 보고, 저리 보다 부딪히기도 일쑤이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입가에 절로 미소를 띤다. 그걸로 인사를 대신한다. 몇 번 만난 사람들처럼 인사가 어색하지 않다. 모두의 눈동자엔 지평선 바다 위를 일렁이는 볕의 반짝거림과 평화로움이 그득하다. 저녁을 먹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노천 레스토랑은 이미 분주하다. 테이블에 맥주나 와인, 먹음직스러운 피자 혹은 달콤한 조각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누리는 모습은 여유 그 자체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 마냥 우린 ‘마우이 브루잉(Maui Brewing Co.)’ 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17년, 칼라카우아 거리를 은은하게 밝히는 묵직한 은색 간판에 나는 알 수 없는 설렘을 느꼈다. 짝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그 간판을 보며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2015년, 마우이에서 선셋 세일링을 했다. 바다를 점점 물들이는 붉은빛의 오묘함은 밤의 문을 두드렸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여행자의 가슴을 차분하게 식혔다. 세일링은 성인 전용 투어로 알코올이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원하는 대로 칵테일이나 맥주를 마실 수 있지만, 선셋 앞에 알코올로 취하기란 쉽지 않다. 뭘 좀 마셔볼까 고민하며 진열된 맥주를 살폈다. 그때, 누군가 거품이 반쯤 담긴 코코넛 잔을 들고 우리를 향했고, 어서 빨리 건배라도 해줘야 할 듯했다. 마우이 브루잉이라는 하와이 맥주 회사의 ‘코코넛 포터(coconut porter)’와 그렇게 첫인사를 나눴다. 맥주 마니아라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달콤 쌉싸름한 흑맥주의 맛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너무 무겁지 않은 맛이라 가볍게 넘어갔고 직접 로스팅한 코코넛 향과 초콜릿, 커피의 부드러움이 뒤따라와 끝 맛도 괜찮았다. 마우이 브루잉 앓이를 시작한 건 그즈음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마트에 들러 코코넛 포터 캔맥주 몇 개를 사서 보물 싸듯 수하물에 실어와 아끼고 아껴 특별한 날에 하나씩 마시곤 했다. 서울에서 눈 씻고 찾아봤지만 단 한 곳뿐이었고, 태평양 바다를 건너온 탓에 가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와이에서 마시던 가격을 떠올리면 놀랄만하다. 하지만 일 년쯤 지나자 판매가 저조해 수입을 중단했다고 동네 보틀 샵 점장님께 전해 들었다. 코코넛 포터에 대한 애정은 주류 판매업까지 알아보게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 일찌감치 포기했다.      


‘널 위해 준비했어’라는 듯 남편을 데리고 펍으로 올랐다. 마치 큰 술통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사람들의 수다 사이로 익숙한 음악이 라이브로 흘러나온다. 서버는 우리 기분을 아는 듯 청량한 웃음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칼라카우아 거리를 향해 나란히 앉아 탁 트인 하늘을 바라봤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코넛 포터를 주문했다. 맥주의 시원함을 말해주는 듯 물방울이 송송 맺힌 컵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역시 맥주는 생맥이 진리야! 캔맥주와 차원이 달라!” “이 신선함 어쩔 거야!” 좋다. 좋아를 끊임없이 연발했고, 이 순간이 주는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 몇 잔을 더 부어댔다. 거창한 안주 하나 없이 마시는 맥주 한 잔이지만, 남편과 함께하는 네 번째 하와이 여행의 문을 열기에도, 남편의 고단함을 씻어내 주기에도 충분했다.

마우이 브루잉 본점이 있는 마우이 섬에서도 코코넛 포터를 향한 애정은 멈출 줄 몰랐다. 몇 년 사이 매장이 새단장을 했다. 양조장 앞 먹거리라곤 푸드트럭 두 대뿐이던 모습에서 번듯한 펍을 마련했다. 와이키키의 펍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우릴 유혹한다. 도로 양쪽 길게 뻗은 푸른 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싱-싱 달리다 “우리 제대로 가는 거 맞아?”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길 끝에 조용하게 서 있는 단층 건물 하나가 제대로 왔음을 말한다. 건물 앞 주차장은 이미 복잡하다. 주차장쯤 오니 마우이 브루잉 로고가 한눈에 들어왔고 이내 마음이 발걸음보다 앞서 나간다.      


공기 중에 맥주 효모가 둥둥 떠다니는 듯 기분 좋은 에너지에 취할 것 같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생각하며 펍의 문을 열었다. 마우이 브루잉의 MD 제품이 우릴 맞이한다.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헤~’하고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지 모른다. 직원 두 명이 그런 날 웃으며 바라본다. 아무리 좋아하지만 열 가지 넘는 디자인의 셔츠를 모두 사는 건 아닌 듯해 고민 끝에 하나를 고른다. “‘Hi! I LOVE YOU’라고 적힌 하늘색 티셔츠 XS 하나와 Medim 하나 줄래!”(여기서 Hi는 하와이 표기의 약어이다)      

울창한 나무들이 포근하게 감싸는 펍은 맥주를 생산하는 양조장과 이어졌다. 양조장 어딘가와 연결된 듯한 빨간색 긴 파이프는 기다렸다는 듯 펍의 수많은 맥주 탭을 통해 콸콸 쏟아진다.  통유리창 너머 있는 양조장에는 사람의 키보다도 몇 배나 더 높은 높이, 천여 명이 들어가도 남을 법한 술통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다. 이를 보니 배가 절로 불러온다. 펍에 남은 테이블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운이 좋게 풍경을 내다보기 좋은 자리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테이블 옆에선 실력 좋은 가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테이블 앞에선 몇몇 아이들이 잔디를 놀이터 삼아 논다. 뛰노는 아이들 너머 저 멀리 초승달 모양의 섬 몰로키니가 손 흔들며 반기고, 반대쪽으론 나무 사이로 일몰이 뉘엿거리고 있다.

펍 안의 사람들은 자유롭다.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리지 않았다. 서버들도 시종일관 웃는다. 피맥(피자와 맥주)과 이와 곁들일 타코를 주문한다. 펍을 구경하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코코넛 포터를 시작으로 마나 휘트(Mana Wheat), 비키니 블론드 라거(Bikini Blonde Lager) 등 마우이 브루잉에서 제조하는 다양한 종류의 생맥주로 목을 축이니 몸이 가볍게 녹아든다. 생맥주를 캔에 담아 포장할 수 있어 마우이에 머무는 동안 마실 양을 주문했다. “1000mL로 다섯 캔 투고(To-go)해줘”라고 말하니 담당 서버가 우릴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우린 생맥주의 신선함과 시원함을 며칠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맥주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때때로 가볍게 한두 잔 마시지만, 누구나 그렇듯 맥주는 화장실을 재촉하기도 하고 쉽게 배가 불러 살짝 귀찮기도 하다. 하지만 하와이에 서 마트나 편의점의 주류 코너에만 가도 그렇게 행복해진다. 맥주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가만히 서서 진열된 맥주의 라벨을 구경하는 데에도 한참이나 걸린다. ‘이게 좀 더 예쁘지 않아?’ ‘저건 라벨 디자인이 좀 바뀌었네?’ ‘이런 건 재미있다’ ‘어! 이건 새로 나왔나 봐’ 하며 혼자 웃기도 하고 같이 간 남편 혹은 지인들과 비교해보며 시간을 보낸다.      

국내처럼 어느샌가 지역별 맥주가 유행처럼 번져 하와이 내 브루어리도 많아졌다. 하와이 맥주 중 국내에서 대중화된 빅 웨이브를 제조하는 코나 브루잉, 마우이 브루잉은 물론 각 브루어리 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내는 맥주로 입맛을 자극하고, 각 맥주만의 정체성을 담은 라벨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살면서 우리를 사로잡는 건 참 다양하고 많다. 하와이의 다양한 요소 중에도 그럴 것이다. 누군간 우쿨렐레가 그럴 수 있고 또 다른 누군 훌라가 그럴지도 모른다. 커피가 될 수도, 서핑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이 진하고 씁쓸한 맥주 한 잔이 유독 깊은 잔향을 남긴다. 코코넛 포터를 알고 나서 “맥주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증거다.”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에 절로 공감하게 된다. 



글. 사진 박성혜 

하와이여행 가이드북 <오!마이 하와이> 저자.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프리랜서 에디터.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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