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는 내게 그리 흥미로운 여행지가 아니었다. 유럽의 어느 나라할 것 없이 ‘소매치기’에 대한 위험은 산재했지만, 이탈리아는 유독 더 심하다고 했다. 혼자서 가면 뭐라도 다 털릴 것 같고 여행다운 여행보단 멘붕에 가까운 여행이 될 거라는 생각이 컸다. 먼저 다녀온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조심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 조심과 경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겪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유럽에서는 첫째도 소매치기, 둘째도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 스위스 여행 때 배낭에 열쇠를 달고 다녔는데 남편은 그런 나를 굉장히 예민한 사람으로 바라봤다. 예민함인지 조심성인지 모르겠지만 그 열쇠 덕에 우리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탈리안 열쇠 하나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여행 전부터 남편에게 다른 건 몰라도 소매치기 유형에 대해선 꼭 인지해야한다고 몇 번이고 주의를 줬다. 그렇게 이탈리아에 입성했다.
인천에서 오후 3시 30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오후 7시 30분이 되서야 도착했고 우리를 맞이한 건 영어보다 더 어려운 이탈리아어이다. 공항에서도 소매치기를 조심해야한다는 몇몇 블로그 후기 때문에 우리 부분 초긴장 상태. 좀처럼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남편이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좋겠단다. 배고플 만도 한데 진열장에 즐비한 샌드위치는 전혀 구미를 당기지 않는다. 자리에 앉은 후 주문을 하고 오니 글쎄 남편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두고 음료 코너에 가서 구경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오빠! 가방을 테이블 위에 두고 움직이면 어떻케?” 긴장감이 나의 ‘버럭’하는 성격으로 풀리는 순간이다.
로마 공항에 도착해 시칠리아 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이미 여행을 다녀온 몇몇 블로그에선 로마 공항엔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하여 다음날 아침에 이동할까 고민했는데, 시칠리아에서 살다 온 ‘차차’의 조언 덕에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로마행 비행에서 그동안 모아둔 마일리지로 비지니스 석에 누워왔으니 몸의 피곤은 거뜬하게 이길거라 믿었지만, 그보다 더 ‘소매치기’에 대한 예민함이 마음의 피곤을 몰고 왔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에 도착한 건 밤 10시 30분, 어둠 덕에 달이 유독 더 빛난다. 시내 호텔에 도착한 건 한 시간 뒤이다. 장시간 비행 후 밤늦게 공항버스 타고 캐리어를 낑낑 끌며 호텔 찾느라 헤매는 게 싫어 57유로를 내고 택시를 탔지만, 마음은 버스를 타는 게 더 편할법했다. 젊은 기사가 좁은 시내 길에서 어찌나 심하게 달리는지 절로 안전벨트를 찾게 하는 운전 솜씨를 발휘하는 것 아닌가!
시칠리아 팔레르모 구시가지 내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Corso Vittorio Emanuele), 마퀘다 거리(Via Maqueda)가 교차하는 사거리.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거리다). 이곳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고 요깃거리를 사러 나왔다. 공항에서 버럭 한 후 내내 눈치만 살피던 남편 마음을 풀어주고자 밤거리로 나왔지만, 문을 연 곳은 술집 몇 곳과 감자튀김 가게뿐이었고 이미 나의 컨디션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남편은 문을 연 곳이 더 있지 않겠냐며 자꾸만 저어-기 저 끝까지 가보잔다. ‘그냥 봐도 없는 거 같거든 남편!’
이왕 마음을 풀어주기로 했으니 저어-기까지 따라 걸었지만, 결국 콰트로 칸티 입구에 있는 자판기 매장에서 물과 콜라를 사고, 감자튀김 가게에서 핫도그 하나를 주문했다. 분명 남편도 피곤할 법한데 그저 밤거리를 누비고 싶었나보다. 호텔로 돌아와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잠은 쉽게 들지 않았고, 몸은 시차 적응 중인지, 아님 시차 적응 따위 실패한 것인지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이탈리아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팔레르모 공항을 거쳐 시내까지! 모든 첫 인상이 별로다. 암흑 같은 밤거리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 총알택시 기사, 오랜 역사랍시고 풍기는 이미지도 다 별로다. 몸과 마음의 기운도 없고 예민함과 피곤함이 결국 짜증으로 승화된다. ‘미남들의 나라’라고 하는데 공항에서, 밤길에서 만난 미남들조차 나의 기분을 달래주지 못한다. 이 기분은...... 내일쯤 아니 조식을 먹고 나면 나아지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