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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네마 천국> 모든 씬을 다 외우나 봐!

놈놈놈 시리즈 1 - 체팔루에서 만난 무서운 놈

by 셩혜

아코디언 연주는 침체된 나의 기분을 ‘업’시켜주었지만,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라는 여행지에 대한 흥미는 여전히 쏘쏘하다. 자정 가까운 시간 마주한 콰트로 칸티의 수호신들은 전혀 이색적이거나 로맨틱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음산하고 퀴퀴한 골목 어딘가에서 갑자기 마피아들이 툭 하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흥미도 없는데 거긴 왜 갔어?’라고 묻는다면 순전히 ‘남편’ 때문!

남편은 영화 <시네마 천국>의 덕후이다. 일할 때는 보지도 못하면서 가방에 항상 영화 DVD를 넣어 다닌다. 출장을 가도 빼놓지 않고 이번 여행에도 역시나 챙겨 왔다. 여자 가방의 화장품 파우치와 같은 존재가 남편에겐 <시네마 천국> DVD인 것.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엔 어김없이 이 영화를 본다. 그런 날은 대부분 자정을 넘어 귀가하기 일쑤인데 러닝타임이 세 시간이나 되는 감독판 DVD를 다 보려면…. 게다가 중간에 멈추는 일은 절대 없다. 영화만 보면 다행이다. 설명은 또 어찌나 하는지. 게다가 꼭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나는 죽기 전에 너랑 저긴 꼭 가 볼 거야!” 그렇게 그의 말처럼 우리는 영화 속 ‘저기’인 시칠리아에 왔다.

팔레르모 프레토리아 분수 Fontana Pretoria

여행 비수기인 12월 동양인은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우리 부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뜨겁게 느껴진다. 여행 3일째, 시칠리아 주도인 팔레르모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체팔루(Cefalù)’에 갔다. 단순히 여행 코스이기보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오전 9시와 11시 두 대의 기차가 있었는데 남편은 서둘러 가고 싶은지, 9시 기차를 타잔다. 팔레르모 중앙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몇 개의 간이역을 지난다. 잠시 정차한 어느 역에서 남편은 기차 창문이 뚫어져라 그 역을 쳐다봤는데 이유는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무심결에 넘겼고 체팔루에 도착하기까지 평화로운 지중해에 시선을 고정했다.

체팔루 역 벽화

체팔루 역에서 하차하는 이들의 절반은 여행객이다. 작은 마을이라 도보로 다니다 보면 함께 기차를 타고 온 이들을 서너 번은 만나게 된다. 역에서 번화가로 가는 길, 작은 삼거리.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유럽 영화에서나 볼법한 감성의 씬이었다. 이색적이거나 특별한 건 아니다. 그저 작은 삼거리 카페에 앉아 노곤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네 할아버지들의 평범한 순간이었지만, 여행객인 내겐 그림처럼 보였다. 그러고 불쑥 튀어나온 한 마디.


“오빠 나 여기서 한 달 정도만 살아 보고 싶다. 언젠가 꼭 한번 체팔루에서 한 달 살아봐야겠어.”


이탈리아고 시칠리아고 싫다더니….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장동건이나 현빈 같은 절세 미남이 서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 것도 아닌데, 마음을 뺏기다니! 냉랭하던 내 마음은 체팔루에 만난 할아버지들 때문에 조금씩 따뜻함으로 물 드는 듯했고 그들의 깊게 파인 이마 주름은 웃을 때마다 내 심장을 어택 하는 것 같다.

카페에 앉은 할아버지들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후 발걸음은 이내 가벼워졌다. 마을 전망대라 할 수 있는 ‘로카 디 체팔루(Rocca di Cefalu)’에 올라 전경을 눈에 담았다. 커다란 종탑이 있는 ‘체팔루 대성당(Duomo di Cefalù)’, 붉은 벽돌의 지붕, 지붕 사이사이로 난 작은 골목길, 골목길에서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는 동네 개와 고양이, 그리고 지중해의 넘실거리는 파도와 여름철이면 북적이는 비치까지. 성벽의 흔적을 간직한 담벼락에 앉아 내려다보니 고요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고 불어오는 바람은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송송 맺힌 등의 땀방울을 씻어냈다.

로카 디 체팔루에서 내려다본 전경

전망대까지 다녀오니 배가 더 빨리 고픈 듯하다. 비수기인 데다 시에스타(siesta)까지 겹쳐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저장해둔 동네 맛집도 영업하지 않을뿐더러 대부분 문을 닫았다. ‘어쩌지’하고 마냥 걷다 문이 열린 곳이 있어 슬쩍 보니 홀에서 바다가 보이는 것 아닌가! 남편은 두말하지 않고 들어가잔다. 해물 스파게티와 생선 튀김을 뚝-닥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은 영화 속 장소로 향했다. 체팔루에서 촬영된 건 겨우 몇 장면에 불과한데 그중 바닷가에서 촬영한 장면이 유명해 많은 사람은 이곳을 <시네마 천국> 촬영지라고 부른다.

영화 촬영 때 세트로 만든 가벽은 없어진 지 오래고 그곳을 지키는 몇 개의 벤치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이곳을 찾는 동네 주민과 여행객을 반긴다. 우리도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벤치엔 먼저 도착한 여행객과 몇몇 커플들이 영화의 향수에 젖은 듯했다. 남편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는지 방파제에 꽤 오래 걸터앉아 있었다.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일부러 방해하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곁에 앉아 보란다. 방파제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니, 참 작은 어촌 마을이 어쩌다 영화 촬영지가 되었는지, 또 어쩌다 여름철 관광지가 되었는지 한참을 노닥였다(체팔루에는 휴양지를 상징해주는 리조트 ‘클럽메드’도 있다).

옛 성문인 Porta Pescara, 중세 시대 빨래터인 Lavatoio Medievale Fiume Cefalino, 체팔루 비치를 거쳐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외쳤다. “어 여기! 여기 거긴데”하더니 문 열린 건물 안으로 쑥-하고 들어갔다. 돌로 만들어진 문패를 보니 농구 교실이라 적혔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초록색 천으로 뒤덮인 공간이 있다. 갑자기 ‘휙’하고 돌아보더니 “오빠 눈썰미 믿지?”라고 한다. 아놔.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자신감이람!

사진을 실컷 찍고 나온 남편이 영화 속 장면을 설명했다. 중년이 된 토토가 그의 첫사랑인 엘레나와 꼭 닮은 소녀를 만나게 되는 장면에 등장하는 장소란다. 우연히 한 학교 앞에서 그 소녀를 만나게 되고 다시 그녀를 보기 위해 학교 앞으로 찾아오는 데 그 장면에 등장했다고.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영화에서 비중 있게 나온 장소는 아닐법한데 하여튼 그렇다니 그렇다 치자.

영화 <시네마 천국> 속 장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도, 숙소에 도착해서도 그의 감정은 멈출 줄 몰랐다. 남편의 눈썰미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숙소로 돌아와 영화를 다시 찾아봤다. 딱 3초 나온다. 아-. 이 남자 정말 무서운 놈이다. 게다가 체팔루로 가던 길 남편이 뚫어져라 쳐다본 그 기차역인 Lascari역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였다. 별 흥미 없는 시칠리아였지만, 우릴 향해 웃어주는 동네 노인들이 있던 체팔루는 어쩌면 이 남자의 눈썰미 때문에 더 오래 기억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전생에 인어공주였는지 아님 물고기였는지 어촌이 이렇게 좋담. 빅 아일랜드 코나도, 체팔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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