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 시리즈 3 - 그 놈의 인생 영화 <시네마 천국>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쓰는 말인가 보다. 플리스 집업을 입고 목도리를 하고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잤는지 온 몸이 쑤신다. 벽에 붙어 있는 난방기는 폼인지, ‘호’하고 입을 떼니 입김이 나온다. 이 호텔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이불 속이다. 팔라쪼 아드리아노의 둘째 날이 밝았지만 좀처럼 이불 밖에서 나오질 못한다.
마땅히 할 것도 없는 이곳에서 “오늘은 뭐하지?”하고 묻는 내가 웃기는지 “뭘 꼭 해야 해?”라고 남편이 대꾸한다. 그래, 그렇겠지! 당신이 좋아하는 곳이니, 여기 있는 것만도 좋겠지! 사실은 이 동네에서 볼 만한 건 어제 다 본 거 같은데 오늘은 뭐하냐! 말이다.
나름 호텔이라고 조식도 제공되었지만, 움츠린 몸과 마음을 녹이기엔 빵 쪼가리보다 덮밥과 국밥이 제격일 듯하다. 남편은 캐리어 열어 식사를 준비했다. 따뜻한 국물이 속을 채우니 추위도 견딜만했다. 생각해보니 호텔보다 밖이 더 따뜻할 수 있을 것 같아 채비를 서둘렀다. 남편은 마치 첫사랑이라도 만나는 듯 거울 앞에서 꽃단장이다.
영화 <시네마 천국>은 남편이 좋아하는 영화이지 난 좋아하지 않는데! 남편이 큰 감흥을 느낄 때 나는 뭘 느껴야 하나! 나가기 전부터 걱정이다. 그래도 또 굳이 좋은 건 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남편 탓에 안 나갈 수도 없고, 호텔 방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한들 이 추운 곳에서 딱히 할 건 없다. 따라 나가는 수밖에.
돌로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길은 경사까지 져 걷는 게 쉽지 않았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광장을 중심으로 한 마을은 몹시 단조롭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집 사이로 크리스마스 장식이 시선을 끈다. 드문드문 세련된 집은 공사를 한 모양이다. 집을 팔겠다는 부동산 전단지도 붙어있다. 구경하는 것도 한 두 집이지, 골목마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돌아보는데 정말 욕이 나올 지경이다. ‘그래, 남편이 좋아하니깐’하고 참고 또 참았다. 힘든 표정은 감춘 들 처지는 발걸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 그냥 따라 갈게. 먼저 가”하는 나를 달래느라 중간중간 쉬었지만, 나는 안다. 남편의 마음은 한시도 쉬고 싶지 않다는 걸.
남편은 영화 <시네마 천국>을 통해 일하는 태도, 우정을 지키는 방법, 진실한 사랑, 슬픔을 이겨내는 법 등 모든 인생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가치관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니 남편에게 이 마을은 몹시 특별한 장소이다. 흔히 말하는 <시네마 천국>의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는 곳, 영화 속 한 장면 한 장면을 더 선명하게 해 줄 곳이다. 어쩌면 꿈의 여행지였을지도 모른다.
알베르토의 집 앞 계단과 거리, 토토가 어린 시절 살던 집, 청년 토토가 앉아 고뇌하던 바위와 성당 앞 계단, 알베르토와 토토가 나란히 앉아 대화 나누던 파란 문, 광장의 종탑과 분수대 등을 찾으며 남편은 행복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마치 소풍날 보물 찾기에서 큰 보물이라도 찾은 아이처럼 말이다. 바위 앞 집 할머니는 “어떻게 여길 찾았어?”라고 물었고, 파란 문 앞 집주인은 사진 찍는 우릴 보며 웃었다. 영화 속 모습과 달라 혹시 공사를 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 했다. 시간의 흐름 앞에 조금씩 변한 곳에서는 내심 아쉬워했지만, 장소 하나하나를 찾을 때마다 언제 휴대폰에 캡처해뒀는지 영화 속 장면을 보여주며 내게 설명을 했다.
움베르토 1세 광장에 있는 시청사 내 <시네마 천국> 박물관에 들러서는 꽤 오래 머물렀다. 어제 만난 봉사자는 다시 온 우리에게 ‘본 조르노’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남편은 받아쓰기 시험 100점을 받은 아이처럼 자기가 찾은 장소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뽐냈고 봉사자는 “여기 사는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다 찾았냐?”라며 남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렇게 오전이 흘렀다. 밤새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못 찾으면 어떡해야 하나 꿈까지 꾸었다는 남편은 두 시간 만에 원하는 대로 다 찾고, 30년이라는 영화 속 세월을 무색하게 해 버렸다. 눈썰미가 좋은 건지, 영화에 미친 건지, 직업적(남편은 드라마 로케이션 디렉터이다) 역량인 건지 어느 하나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남편이 이렇게라도 열정적으로 푹 빠져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싶다.
동네 어른들은 왕복 200~300m도 되지 않는 움베르토 1세 광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엄마를 차에서 내려다 준 젊은 여자는 다시 차를 돌리더니 길을 지나던 한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키스까지 나눴다. 언제 출고된 차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올드카는 영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았지만 성능만은 쌩쌩해 보였다. 콧수염이 있는 할아버지는 알베르또 같았고, 작은 꼬마 아이는 어린 토토, 뒷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학생은 청년 토토, 예쁘장한 소녀가 지나갈 때쯤이면 엘레나 같다고 생각했다. 광장 벤치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화 속 음악을 들으며 몇 시간쯤 사람 구경을 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기꺼이 되었다.
저녁은 선택의 여지없이 어제 그 호텔 아래 피자집! 피자 종류만 바꿀 뿐이다. 몹시 단조로운 하루였지만, 마치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영화 속에 블랙홀처럼 빠져 들었다 나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지금껏 여행하며 만난 그 어느 곳, 어느 사람들보다 일상을 영화처럼, 매 순간을 평범하지만 눈부시게 보내는 것 같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본 팔라쪼 아드리아노는 그랬다. 지금 생각해도 그 날이 영화처럼 타임랩스 되어 재생되는 것 같다. 영화가 아니었으면 몰랐을법한 작은 시골 마을, 팔라쪼 아드리아노는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을 한 아름 주었고 남편이 얼마나 이 영화를 애정하는지 느낄 수 있게 했다. 영화 속 마을 Giancaldo의 실제 무대 팔라쪼 아드리아노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곳으로 오래토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