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다를 지나가는 배
책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책은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전학을 반복했던 탓에, 막 친해진 친구와도 금세 헤어져야 했고
그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책이 대신해 주었다.
이솝우화와 안데르센 동화, 파브르 곤충기와 삼국지까지.
책 속에는 언제나 내가 알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던 때에는 어딘가에 정말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을 것 같았고, 내가 없는 곳에서는 동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학창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운명에 순응한 채 떠나는 동이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윤동주의 '서시'와 '별 헤는 밤'에서는 시대가 남긴 부끄러움과 슬픔을 함께 느꼈다.
책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나를 타인의 삶과 세상으로 여행하게 했다.
역사 소설을 읽으며 ‘만약’의 조건으로 나만의 역사를 그려보기도 했고,
SF 소설에서는 미래 사회와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보았다.
시인들의 문장과 단어들은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열어주었다.
여행길에서는 주로 소설과 에세이를 즐겨 읽었다.
여러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내 삶을 포개어보는 일은 퍽 위로가 되었고,
에세이는 다른 사람의 태도와 시선으로 나의 일상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했다.
돌아보면 독서는 언제나 타인의 삶을 통과해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일이었다.
책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닿지 못했던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었고,
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놓는 힘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는 압도적인 바다와 끝내 맞서는 노인을 보며
삶의 거센 파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의 품격을 배웠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가 인간의 마지막 존엄임을 깨닫게 했다.
“영화는 술과 같고, 책은 물과 같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영화가 감정을 끌어올린다면, 책은 감정을 가라앉힌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책은 구조를 드러내고 생각을 깊게 만든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책이 방향을 잡아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풍경이라면, 책은 지형이다.
길을 잃었을 때 날 비추는 등대는 언제나 책에 있었다.
시대가 변하며 형태는 달라졌지만 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책은 생각의 공간이자 감정의 기록이며, 시간의 보관소이고,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창이 되어준다.
돌아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결국 내가 읽어온 책들이었다.
그래서 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생각과 감정의 원천이 통째로 지워지는 느낌이랄까.
책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접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불가능할 것 같다.
Books are the plane, and the train, and the road. They are the destination, and the journey. They are home. – Anna Quindlen
책은 비행기이자 기차이고, 길이기도 하다. 책은 목적지이자 여정이며, 결국 집이다. – 안나 퀸들렌
I have always imagined that paradise will be a kind of library. – Jorge Luis Borges
나는 천국이 아마도 도서관과 같을 것이라 늘 상상해 왔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