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음의 두 얼굴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는 배고픔의 신호가 오면 부지런히 식당을 찾는다.
홀로 문을 밀고 들어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롯이 음식에만 집중해 충만한 시간을 즐긴다.
그에게 혼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행복으로 공복을 채우며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는 행위다.
그래서 그는 ‘외로운 미식가’가 아니라 ‘고독한 미식가’이다.
바야흐로 혼밥과 혼술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 역시 집에서도, 밖에서도 스스럼없이 혼자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난이도가 제법 높다고 하는 고기집에서도 가끔은 혼자 고기를 굽는다. 물론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여서 좋은 순간도 많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만 깃드는 종류의 행복이 있다.
누구의 기분도 맞출 필요 없는 시간과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호흡, 오롯이 나만을 위해 사용하는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혼밥, 혼술뿐 아니라 혼자 달리고, 혼자 여행도 즐긴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나를 외롭거나 특이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특별히 괘념치 않지만, 때로는 이것이 외로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고독과 외로움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다.
외로움은 관계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결핍의 감정이고, 고독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충만의 시간이다.
외로움은 원치 않게 찾아오는 단절이며, 뇌가 신체적 고통으로 착각할 만큼 날카로운 통증을 만든다. 그래서 외로움에는 눈물과 분노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반면 고독은 홀로 있음의 조건은 같지만, 출발점이 다르다.
외로움이 강제된 고립이라면, 고독은 자발적 거리두기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를 다시 바라보는 능동적 고립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상태를 ‘비본래성’이라 불렀다. 남들이 바라는 내가 되고, 남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살며, 내 감정보다 사회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삶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본래의 나로 귀환하는 첫걸음은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는 데서 시작된다. 고독은 그 귀환의 문턱이며, 고독 속에서 인간은 역할의 껍데기를 벗고 오롯이 ‘존재’ 자체로 남는다.
이 고독의 힘을 사회적 차원에서 확장한 이가 바우만이다. 바우만은 현대인이 수많은 연결 속에서도 외로운 이유를 ‘관계의 얕음’에서 찾았다.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은 좀처럼 닿지 않는 시대. 바우만은 관계를 더 늘리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깊이 연결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 외로움을 줄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고독을 견딜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스스로와 단단히 연결되지 못한 사람은 누구와도 제대로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고독은 관계를 거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관계를 더 깊고 진실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고독이 깊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집착하지 않고, 누군가를 소모하지 않는다. 관계를 더 따뜻하게, 더 균형 있게 받아들인다.
윤동주는 불 꺼진 방에서 '내면의 소리'를 들었고, 몽테뉴는 탑 속 요새에서 사유의 근육을 길렀으며,
니체는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고 외쳤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고독은 나를 비워내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채워 넣는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고독해져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물러나 나에게로 되돌아가는 그 시간 속에서만
비로소 나는 다시 견고해지고, 다시 자유로워져 다시 나로 돌아올 수 있다.
시인 황동규가 말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처럼, 고독은 외로움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비추어 나를 견고하게 빚어내는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