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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나고, 병사들의 시체들은 어디로 갔는가?

전장 이후의 세계, 방치, 매장, 화장 사이에서 인간이 택한 길

by 까막새

전투가 끝나고, 병사들의 시체들은 어디로 갔는가?

- 전장 이후의 세계, 방치, 매장, 화장 사이에서 인간이 택한 길



해가 기울면 전장은 말수가 줄었다.


칼과 방패가 내던 소리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거대한 노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노동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투가 끝난 뒤, 사람들은 늘 같은 질문 앞에 섰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누구부터 처리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지금 당장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세 갈래로 수렴했다.

방치, 매장, 화장.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세 갈래가 결코 동일한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각 선택은 시간과 인력, 지형과 계절, 종교와 정치의 교차점 위에서 매번 다르게 무게를 달았다.

그 결과 전장의 사후 풍경은 어느 문명에서나 유사했지만, 전혀 같지는 않았다.



첫 장면은 언제나 남는 사람들의 손에서 시작한다.

대규모 전투 직후, 살아남은 병사들은 즉시 시체 처리에 투입되지 않았다. 전술적 추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승전군에게는 빠른 추격이 더 많은 전략적 이득을 의미했고, 패전군은 후퇴를 다듬어야 했다.

지휘관은 병력을 재편성하고 보급로를 정비하며, 때로는 성벽을 점령하거나 다음 지점으로의 이동을 서둘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전장의 첫 24~72시간—이 방치의 시간대였다.

부패가 급격히 진행되기 전 움직여야 한다는 이성과,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패배가 될 수 있다는 군사적 현실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그 결과, 특히 여름철의 전투나 장거리 원정, 기동전이 뒤따르는 전투에서는 방치가 일상처럼 발생했다.

시신은 해가 두 번만 바뀌어도 상태가 변했고, 파리와 짐승이 먼저 도착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냉혹한 정치적 언어로 사용했다. 적의 시체를 굳이 내버려둠으로써, 다음 적에게 전할 무언의 경고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이 세 갈래의 길은 동시에 열려 있었다.

폴리스 전쟁의 관습 속에는 사자 수습을 위한 단기 휴전이 등장한다. 적이라도 죽은 자의 회수를 허용한다는 최소한의 합의였다. 그러나 합의는 매번 성립하지 않았다. 휴전이 깨지거나, 적대가 너무 깊으면 전장은 그대로 남았다.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집단 매장은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다양한 전투터 주변에서 혼합된 인골과 무기 파편이 발견되어 왔다. 하지만 집단 매장을 위한 도구와 인력, 구덩이를 팔 시간과 토질이 충분히 주어지는 전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화장은 더뎠다. 광범위한 화장에는 건조한 연료가 필요했고, 분산된 화장대가 필요했으며, 불길과 연기에 대한 주민 민원과 종교적 제한도 고려해야 했다. 그리스는 전사자의 화장을 문화적으로 수용하는 토양을 갖고 있었고 로마도 화장과 매장이 공존했으나, “대규모 전장 즉시 화장”은 자원이 따라줄 때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대규모 전투 이후에는 방치→후속 매장, 혹은 방치→부분 화장→이장이라는 단계가 반복되었다. 그 사이와 그 이후에야, 지휘관과 귀족,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사자들이 개별 장례를 치렀다.



집단 매장은 기술이었다.

구덩이는 길고 깊었으며, 때로는 얕고 긴 도랑 형태였다. 수분이 많은 토양에서는 침출과 악취가 심해졌고, 산성도가 높으면 뼈의 보존성이 떨어졌다. 구덩이는 바람과 물길을 고려해 파였고, 흙은 멀리 던져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한꺼번에 많은 시신을 처리해야 할 때, 인력은 포로와 노예, 혹은 징발된 주민에게서 충당되었다. 도구는 삽과 괭이, 들것과 수레가 전부였다. 무기는 대개 회수되었고, 장신구는 사라졌다. 석회가 뿌려진 흔적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을 모든 전장에서의 표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석회는 수급과 운송, 비용 문제로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었다. 오히려 더 흔한 것은 급하게 덮은 흙층과 급속 매장의 지층 흔적, 얕은 표토에서 재유출된 인골, 그리고 뒤늦게 진행된 이장의 흔적이다.



물은 또 하나의 해결책이자 문제였다.

일부 전투에서는 전장 인근의 하천으로 시신이 유입되거나 의도적으로 던져졌다. 물은 냄새를 희석시켰고, 흐름은 흔적을 옮겼다. 그러나 홍수와 개수 때 인골이 재유출되는 사례가 반복되었고, 하류의 불안과 공포를 키웠다.

이것은 제도화된 관행이라기보다, 처리 능력이 부족할 때의 임시 수단이었다.

동물에 의한 훼손은 방치의 거의 필연적 결과였다.

까마귀와 독수리, 들개가 전장 가장자리부터 접근했고, 이는 곧 장기화된 방치를 증명하는 지표가 된다.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운용”했다는 의심도 가질 수 있지만, 자연이 개입하는 방치의 단계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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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로 넘어오면, 종교 공간이 전장의 사후 처리에 깊이 관여했다.

수도원과 성당은 전사자 임시 안치와 공동 매장, 간단한 의식을 담당했다.

성직자는 병자와 사망자를 위한 성례를 집행했고, 수의와 기본 의식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방치는 줄지 않았다.

백년전쟁처럼 장기전에선 기동과 약탈, 보급의 압박이 계속되었고, 승전군조차 다음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흑사병 전후로 악취(‘나쁜 공기’)에 대한 공포와 예방 관행이 확산되었지만, 전장 현장에서 이를 일관되게 적용할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옷을 태우고, 가능한 시신을 빨리 덮고, 때로는 작은 화장을 시행했지만, 구체적인 현장은 대개 어지러웠다. 오늘의 전투가 끝나면 내일의 전투가 이어지는 전선에서, 완전한 정리는 늘 뒤로 밀렸다.



방치가 더 많았는가.

정답은 “상황에 따라 그렇다”이다.

여름철 고온다습기, 장거리 원정과 추격, 패잔 상태, 장작·석회·물과 도구 부족, 지방 치안 불안, 종교·관습적 협정 부재—이 조건이 겹칠수록 방치는 널리 발생했다.

반대로 도시 근교 전투, 행정력과 종교기관의 관여, 사자 회수 협정과 장례 관행이 작동할 때는 수습과 매장이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24~72시간 내 완전한 정리는 매우 드물었다.

결과적으로 전장에는 ‘부분 방치’가 광범위하게 남았다.

일부 시신은 빠르게 처리되었고, 더 많은 시신은 며칠에서 몇 주 동안 산재했다.



동아시아의 전장은 다른 종교와 행정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선택지는 같았다.

중국의 평원에서는 전국시대부터 대규모 집단 매장이 확인된다.

제국은 전장 수습에 관청을 동원하려 했지만, 내전과 변방 전투에서는 방치가 반복되었다. 화장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제한적으로 수행되었고, 연료와 시간의 제약은 지중해와 다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국가와 향촌 공동체가 전후 수습에 참여한 기록이 전해지며, 공동 매장과 간이 표식이 일반적이었다. 임진왜란 같은 대규모 전란에서는 방치가 먼저 발생하고, 전황이 안정될 때 후속 수습과 이장이 진행되었다.

유교 장례 관행은 화장을 제도적으로 넓게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 화장은 보편화되지 못했다.

일본의 센고쿠기에는 전투 후 제한적 휴전 아래 자군 시신 회수가 허용되는 사례가 나타났고, 소규모 화장과 매장이 병행되었다. 하지만 잦은 교전과 장거리 이동이 이어지면, 이 또한 방치로 귀결되었다.

에도기 이후 행정력이 강화되면서 일부 질서는 생겼지만, 전국적 표준이라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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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중심을 전장 현장의 절차로 옮겨보자.

먼저 생존자를 찾는다.

신음을 듣고, 살릴 수 있으면 살린다.

그 다음 시신을 분리한다.

운반은 끌기와 들것, 수레가 대부분이다.

구덩이는 토질을 본다.

물이 고이면 매장 후에도 악취가 난다.

흙이 마르면 삽질이 잘 안 된다.

화장은 바람을 본다.

연기가 마을로 가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망라되어도, 그날의 해가 지면 대부분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 날이 오기 전에 많은 결정이 내려지고, 많은 방치가 적립된다.

이름을 적을 수 있으면 적지만, 대개는 적지 못한다. 표식은 나무와 돌이다. 비가 오면 사라진다. 나중에 돌아와 이장하는 경우, 이미 많은 흔적이 바뀌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자료로 남는 순간은, 후대의 발굴에서다.

집단 매장지의 혼합 골격, 급속 매장 지층, 동물 치식 흔적, 재의 퇴적층, 재차 매장된 자취가 역사적 사실로 변한다.



방치의 사회적 파장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방치는 치안을 악화시켰다. 약탈과 암시장이 붙었고, 유골 훼손과 분쟁이 뒤따랐다. 악취와 불안은 지역 사회의 서사를 바꾸었다. 물은 오염의 공포와 함께 일상의 리듬을 바꾸었고, 경작지는 회복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동시에, 방치와 무명의 매장은 기념과 기억의 동력을 만들었다.

후대의 도시는 이름 없는 자들의 묘역 위에 기념비를 세웠고, 박물관을 만들었고, 때로는 공원을 조성했다. 전장은 시간이 지나 사회의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묻고, 과장을 걷어내고, 최소한의 예의를 기록하려 했다.



다시 로마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종종 적을 방치했다.

이는 계산된 메시지였고, 권력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로마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문명에서든 “적의 시신”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반대로 지휘관과 귀족, 이름이 알려진 전사자는 회수되어 가족과 도시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분리는 계급과 정치가 죽음 이후에도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협정이 있었다. 사자 회수권은 때때로 보장되었다. 이 모순은 전장의 윤리다. 전투에서는 서로를 쓰러뜨리고, 죽음 앞에서는 서로를 인정한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이 균열 속에서 인간은 최소한을 지키려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첫째, 방치는 우발이 아니라 구조다. 전장 사후 처리의 세 갈래 중 방치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선택 가능한 길이었고, 현장의 제약이 이를 평범한 선택으로 만들었다.

둘째, 집단 매장과 제한적 화장은 가능한 자원이 있을 때 선택된 현실적 최적화였다. 도구·시간·연료·치안·종교·기상 조건이 맞아야 했다.

셋째, 협정과 종교, 행정력이 작동할 때조차 전면적·즉각적 정리는 드물었다.

넷째, 동아시아와 지중해, 중세 유럽의 차이는 방식의 선호와 제도의 언어에서 나타나지만, 제약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장면은 오늘의 기술적 세계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의 전장에서는 냉동 컨테이너와 표준작전절차, DNA와 데이터베이스가 동원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누구부터, 어떻게, 지금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똑같다.

여러 날에 걸친 방치가 발생하면, 이후의 절차는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이것은 고대와 중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날것의 지식이다.

과장 없이 말하면,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덮으려 했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태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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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사후 처리는 언제나 인간의 능력과 한계가 맞붙는 자리였다.

방치는 패배의 징후가 아니라, 제약의 총합이 만든 결과였다.

매장은 노동이었고, 화장은 자원이었다. 협정은 예외이자 희망이었다.

그리고 이 세 갈래의 길은, 땅속과 재 속과 기억 속에 동시에 남았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방법을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건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다.

전장의 다음 장면은 늘 같지 않다.

그러나 결정하는 손의 떨림은 어느 시대에나 비슷했다.

그 떨림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길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아직 덮이지 못한 자리들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묻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누구를 먼저, 어떻게, 그리고 언제까지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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