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이 강요한 습관과 선택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강령
매일 아침 우리가 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잠에서 깨자마자 손이 저절로 스마트폰을 향하고, 엄지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스크롤하며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를 훑는다.알림을 확인하고, 다음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걸 그저 바라본다.
아침에 누구나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는 일상 뒤에 철학적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이런 행동들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정교하게 설계한 각본에 따른 조건반사일까?
철학하면 일단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헥시스(hexis)'는 “습관”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현대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된다. 현대에서 습관이란 보통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반복 행동을 의미하지만, 헥시스는 정반대이다.
헥시스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숙련된 운동선수가 몸에 밴 동작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도 그 순간순간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이성과 감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적극적인 성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배운다"
정의로운 행동을 반복하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반복하면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실용적 지혜(프로네시스)”이다.각 상황에서 '적절한 중용'을 찾아내는 지적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정직이라는 덕을 체화한 사람은 매번 이익과 손해를 따져가며 정직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정직이 그의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즐겁게 정직한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최고 수준의 인간적 자유다. 제약이 없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올바른 성향을 기른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20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의 아비투스(habitus)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개인적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이 실은 사회적 힘의 무의식적 내재화라는 말이다.
아비투스는 "지속적이고 이전 가능한 성향 체계"로 정의된다. 이는 동시에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이다. 즉, 계급, 가족, 교육 등 사회적 요소들에 의해 형성되면서 (구조화된 구조), 동시에 현재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조직하는 틀 역할을 합니다(구조화하는 구조)
이렇듯 부르디외의 날카로운 통찰 중 하나는 취향에 대한 분석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고급스럽다' 혹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 심지어 음식 취향이나 운동 선호도까지도 사회적 지위의 표현이라는 주장이다. 공장 노동자의 식생활 패턴과 기업가의 식생활 패턴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들이 마치 '자연스러운' 개인적 선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 아비투스가 만들어낸 무의식적 선택이고 이는 결국 구조화된 사회의 틀에서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을 뿐이라는 관점이다.
이렇게 보면 자유는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실제로는 사회 구조가 미리 정해놓은 틀 안의 선택지 내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현대로 오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디지털 플랫폼들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습관을 설계하고 조작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넷플리스, 스포티파이 같은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아니 이 녀석이 내 취향을 어떻게 알았지 좋아라할 게 아니라 내 내면의 생각과 심리상태를 꿰뚫어본다는 측면의 두려움도 있어야 한다.
신호(Cue) : 알림이 뜬다
루틴(Routine) : 앱을 연다
보상(Reward) : 도파민이 분비되는 흥미로운 콘텐츠를 본다
여기에 변동적 보상 시스템까지 더해지면 우리는 자유의자가 아닌 알고리즘이 설계한 틀 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궁긍증은 다음 영상이 재미있을지 지루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우리를 계속 스크롤하게 만들게 되고, 이는 중독에 이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여기에 우리의 선택 의지라는 착각은 허울에 불과하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쇼샤나 주보프 교수가 명명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는 이런 현상의 경제적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인간의 경험과 행동 데이터가 무료 원자재로 수집되어 '예측 상품'으로 가공되고, 이는 다시 미래 행동에 베팅하는 시장에서 거래된다.
더 무서운 건 이 산업의 경쟁 논리가 단순한 예측을 넘어 적극적인 행동 조작으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지 알아내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넛지하고, 조율하고, 몰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주보프는 이를 '빅 브라더'가 아닌 '빅 아더(Big Other)'라고 부른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 브라더가 극단적 관심으로 인간을 동화시키려 했다면, 감시 자본주의는 극단적 무관심으로 인간을 타자화한다. 사람들은 그저 데이터를 생산하는 도구일 뿐, 기업들은 소비자의 감정이나 생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실제 사례를 짚어보면, 2014년 페이스북은 70만 명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뉴스피드 알고리즘을 조작해 감정이 SNS를 통해 전염될 수 있다는 연구를 진행했다. 사용자들의 동의 없이 일부에게는 부정적 콘텐츠를, 다른 일부에게는 긍정적 콘텐츠를 노출시켜 감정 변화를 관찰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용자들은 실험 대상일 뿐, 그들의 실제 감정이나 정신건강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는 심각한 관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주당 40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할 경우 우울감을 호소할 확률이 50%에 달한다는 연구가 있다.
특히 25세 이하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심각한데, 뇌가 아직 발달 중이라 알고리즘의 조작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디지털 사용 패턴이 자연스럽게 정신건강 악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주의력 저하, 수면장애, 감정조절 장애는 이제 일상적으로 발견되는 증상들이고, 여러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집중적으로 파혜친 분야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 사이에서 디지털 디톡스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고, 다양한 앱이나 강좌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간단하게 알람을 차단하거나 취침전 1시간 동안은 디지털 디바이스를 멀리하는 새로운 “습관”만으로도 꽤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스스로를 절제하는 실천만이 정신건강은 물론 신체적인 리듬을 긍정의 패턴으로 바꾸는 가장 손쉽고 오래할 수 있는 열쇠이다.
스마트폰을 상자에 넣고 시간을 설정하면 정해진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금욕상자나 '셀프리 스페이스', 즉 집안의 특정 공간을 디지털 기기 사용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는 강제적인 방법이라도 좀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알고리즘 아비투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현대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용적 지혜, 즉 '디지털 프로네시스 (실천적 지혜)'를 기르는 방법이 제시된다.
디지털 공간에서 선(公)과 해(害)를 분별해 맥락에 맞는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판단력과 습관을 뜻한다. 즉, 정보 홍수·알고리즘 편향·감정 전염이 빠르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사실성, 공익성, 책임성을 종합적으로 따져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핵심 능력이 필요하다.
첫째, 비판적 의식. 부르디외적 관점에서 구조적 힘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한다.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 알고리즘 작동 방식, 불평등 재생산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다. '게임의 진짜 규칙'을 알아야 한다.
둘째, 의도적 실천. 아리스토텔레스적 노력으로 새로운 디지털 사용 습관을 의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디지털 생활에 의도적인 '마찰'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방법 몇가지를 살펴보면 이해가 한층 쉬워진다.
알림 끄기 : 정말 필요한 메시지 서비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알림을 차단한다.
시간 제한 설정 : 갤럭시의 '디지털 웰빙' 같은 기능을 활용해 SNS 사용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한다.
피드 큐레이션 : 추천 알고리즘의 버블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선택한다.
정기적 디지털 단식 : 주기적으로 완전히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갖는다.
쉬워 보이지만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는 순간 불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전원을 한시간 꺼놔도 지구는 열심히 자전을 하고 정말 중요한 통화나 문자는 1시간 이후에 확인해도 된다.
물론 개인적 저항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알고리즘 행동 조작의 규모와 속도, 불투명성을 생각하면 개인은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문제로 귀결된다. 자율적 선택 능력의 상실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민주 사회의 근간을 위협하는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사고와 도덕적 판단 능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개인은 힘을 모아 집단으로 강력한 대책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에게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플랫폼들이 어떤 방식으로 콘텐츠를 추천하는지 공개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법적인 장치를 요구해야한다. 개인정보보호법을 넘어서는 행동 데이터 수집과 활용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고, 최근에도 계속 발생하는 해킹사고 등에 대한 징벌적 손해비용을 사회적 책임으로 전가시켜야 한다. 카드 유출 사고 해놓고는 겨우 문자서비스나 공짜로 쓰게 해주겠다는 발상을 하는 회사 경영진의 안일함이 어쩌면 가장 위해한 생각 아닐까?
궁극적으로 감시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난 새로운 디지털 모델 개발을 위한 사회적 합의와 지원도 고려해볼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히 스마트폰 중독이나 탐닉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다. 누가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이끌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헥시스가 보여준 적극적 자유, 부르디외가 폭로한 사회 구조의 은밀한 지배, 그리고 현재 우리가 직면한 알고리즘 아비투스의 정교한 조작 -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복잡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마땅히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제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제약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디지털 생활 설계가 아닐까.
매일 아침 스마트폰을 집어 들 때, 잠시 멈춰서 생각해보자.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선택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각본에 따른 것인지를.
그 작은 의식적 선택들이 모여 진정한 자유를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