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언제나 매혹적인 노스텔지어인 이유를 찾아서
눈이 시리도록 파란색의 바다.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장. 여름보다 겨울이 더 잘 어울리는 장소.
"동경"이라는 단어와 "노스텔지어"라는 단어가 제일 매칭이 잘되는 장소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는 "바다"였다. 짠내 그득하고 갈매기 똥냄새가 담긴 텁텁한 바람이 더러운 신문지 조각을 날리는 그곳도 바다였지만 그래도 바다 가는 발걸음은 즐겁고 가볍다.
머리속에 있는 낭만적인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 가장 큰 게 바다. 자동차로 낮은 담장의 집들을 지나다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제주 바다의 눈이 부시던 파랑은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 미역 줄거리 해조류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찜찜한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건 싫다.
바다는 늘 알 수 없는 혼란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그래도 올 겨울에도 긴 파도 속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바다 여행은 갈 것이다. 작가는 매혹적이지만 항상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진 것은 아닌 바다 속에 숨겨진 27가지, 잘 몰랐거나 어렴풋이 알던 내용을 들고 나타나 오랜 친구처럼 두런두런 이야기 들려준다.
좋은 책 아닌가! 모험과 신비로움이 책 한 권으로 만나는 세상.
바다에 대한 잡학사전 느낌의 책은 컬러사진과 더불어 누구나 궁금하거나 관심을 끌 만한 내용 27가지를 소개하면서 올여름 코로나로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동경의 그곳을 소개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스타벅스 이야기.
스타벅스의 명칭이 멀빈의 모비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조금 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유명한 세이렌의 로고가 쓰이게 된 이유와 디자인의 변화되는 모습도 알 수 있다. 세이렌은 여성의 유혹 또는 속임수를 상징한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로 뛰어드는 충돌질을 일으킨다. 책이나 그림에 따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끔찍한 괴물의 모습인 경우도 있다. 다만 목소리와 노래는 외모를 떠나 유혹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사이렌이 세이렌의 무자비한 유혹을 경고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도 하다.
세이렌은 두차례에 걸쳐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데 하나는 책에 소개된 대로 오디세우스가 몸을 돛대에 결박하여 버텨낸 케이스 - 이때 세이렌들은 모욕감을 느껴 단체로 자살했다는데, 그냥 결박을 풀어보려는 머리는 안 굴렸다 -, 그리고 뛰어난 음악가이자 시인인 오르페우스가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항해하던 중 세이렌의 노래를 듣게 되는데, 오르페우스가 세이렌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맞대응한다. 역시 심약한 세이렌은 이에 좌절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바위가 되었다. 알고 보니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자살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라고 한다. 마지막은 결국 비극적인 삶을 산 안타까운 세이렌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세이렌은 제대로 활동을 하는데, 노래를 버리고 커피를 택한 것이 탁월했던 것이다. 어부들이 아닌 핑크 가방 사려 아침부터 줄 서 있는 마니아들을 타겟으로 바꾼 점도 탁월했다.
바닷속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는 에베레스트 산을 꺼꾸로 꽂아 넣어도 약간 모자란다고 한다. 상상도 되지 않는 깊이다. 육지처럼 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평원도 있는 깊은 바다속은 우리가 생각도 못했던 생물들이 차가움과 무광(無光)의 세계에서 엄청난 중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평생 그들과 조우할 일은 없지만 메가트론같은 심해의 포식자들을 동물원에서 만날 수 기회가 주어진다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지. 병든 지구를 탈출하여 우주로 가는 SF소설과 달리 인류 최후의 도피처는 심해가 아닐까 라는 상상도 하게 된다.
후반부에 저자는 바다와 관련된 역사이야기로 흥미를 일으킨다.
"안방에는 대감마님이 곰방대에 담배를 말아 넣어 피우고 있다. 날씨가 쌀쌀 해지고 서리가 내리면 포기 배추에 벌건 고춧가루를 버무려 겨울 김장을 담근다. 하인들은 쌀밥 대신 서민의 겨울 양식인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 먹는다."
고려말 조선초 양반집 풍경으로 크게 문제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조작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작물들은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그 이후 유럽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중국으로 한국으로 물류가 이동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겠는가?
세종대왕은 고추가루 듬뿍 들어간 배추김치와 군고구마를 평생 드실 수 없었다.
콜롬버스의 우연한, 기적적인, 운 좋은 항해는 세계역사의 판도를 뒤흔들었고, 저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는 유럽의 전쟁사를 뒤흔들게 된다.
저자도 필자처럼 영화 매니아인 듯하다.
역사를 영화에 연계시키다 보니 내가 바다이야기를 읽는 거야, 영화이야기를 읽는 거야 헷갈리기도 하나, 역사와 바다 이야기가 머리속에 쏙쏙 들어오게 만드는 매개체로의 영화이야기는 재미없을 수 없다.
콜럼버스로 시작하여 캐러비안의 해적, 뿌리 드라마의 주인공 쿤타킨테, 증기선의 속도경쟁을 이야기한 타이타닉 등, 좋은 영화와 바다의 연계점을 찾아보는 책읽기는 부담 없는 독서로 이끈다.
서양의 바다역사에서 동양의 바다역사로 넘어오면 장보고의 위업과 명나라 환관 정화의 세계일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안타까운 대목도 나온다. 똑같이 서양인들이 난파를 당해 표류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와 일본에 난파된 외국인들은 전혀 다른 대접과 소통을 나누게 된다.
하멜 표류기야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일본에 표류한 제이모토 일행이 어떻게 조총을 일본에게 전수하게 되었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역사에 있어 문화와 기술의 이전은 전달자가 아닌 수용자의 자세가 제일 중요하며 이는 두 국가의 운명의 방향마저 바꾼다는 엄중한 경고를 듣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우리가 유교에서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면 그래서 서양의 문물을 사대주의 했던 것처럼 열렬히 받아들였다면 우리의 현재는 어디에 서있을까 궁금하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던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그보다 빨리 저술되었던 김려의 "우해이어보" 이야기는 물고기의 생태와 살아가는 방식은 물론 즐거운 어류식사생활과도 이어질 수 있을 듯하다. "자산어보"라는 횟집 제목 가게가 있다면 꼭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는 망상이 슬쩍 지나갔다.
두 책은 차이점이 있는데, 자산어보가 정약전 특유의 세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을 했기에 백과사전으로 손색이 없고, 문학자였던 김려의 "우해이어보"는 수산물에 대한 관찰, 기록과 함께 진해지방 풍속이나 생활상도 그려내고 있기에 여행기같은 느낌도 든다. 양쪽 모두 방송사들이 제대로 기획을 잡고 비교해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준다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든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역사 이야기에 대한 할애가 좀 많다는 생각이다. 전반부에 있는 바다의 자연학적 접근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아쉬움이다.
바다는 항상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의외로 모르는 사실들이 많다. 책 한 권을 통해 바다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수는 없지만 조금씩 지식을 늘려 나가는 기쁨을 가질 수 있어 좋은 독서였다.
전세계에 바다보다 육지가 더 넓다라고 생각했던 중세인과 달리 앞으로도 바다는 인간이 개척하는 것과 동시에 보호해야하는 대상일 것이다. 우주로 가는 비용으로 새로운 터전을 바다로 옮긴다면......세이렌이 우리를 계속 괴롭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