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던 문고리를 당겨보는 날, LP바 혼술

by 감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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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날씨 탓인지 마음에도 먹구름이 낀 듯 괜히 울적하다. 내일은 휴일이고 집콕하기로 마음 먹은 날인데 이 꿀꿀한 기분을 집에 끌고가 내일까지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서기 전에 이 마음 속 칙칙한 기분을 어딘가로 떨쳐낼 방법을 찾아내야했다.

‘그 바에 가볼까?’


오고가는 길마다 눈에 밟히던, 전설적인 록 밴드와 이름이 같은 LP바가 생각났다. <혼술 환영>이라는 입간판에 매번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정작 쉽게 문을 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음악과 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만 같은 그 낯선 세계 속에 내가 들어서있는 모습이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끝내 가게 앞에서 발길을 돌리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발걸음이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비는 생각보다 오래 내렸고, 기분은 가라앉았고, 나는 집에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가게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 벽면은 밴드 뮤지션들의 강렬한 인상이 담긴 사진들로 빼곡했고 발걸음을 옮길수록 조금씩 음악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멜로디와 빗소리가 합주라도 하는듯 감미로웠다. 그 선율을 박자 삼아 남은 계단을 성큼 내려와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처음 오셨나요? 편하신데 앉으시면 됩니다”

막 들어선 입구 앞에서 ‘주문은 어떻게 하는 거지?’,‘여기에 앉아도 되려나?’ 같은 고민을 하며 쭈뼛대고 있을 찰나 사장님의 부드러운 인사가 머릿속에 떠돌던 물음표들을 단숨에 지워주웠다.


길다란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첫 칵테일로 초코 우유맛이 나는 베일리스 밀크를 주문했다. 낯선 자리에서의 어색함을 익숙한 달콤함으로 달래보려했던 선택이었다. 칵테일 한 잔에 같이 나오는 크래커와 치즈를 안주 삼아 함께 홀짝이니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지 그제서야 등받이에 허리를 깊숙이 묻을 수 있었다. 평일이고 막 오픈한 시간이라 많은 테이블이 차있진 않아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달그락 부딪히는 식기 소리, 서로에게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잔잔하게 귓가를 울렸다.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 작은 종이에는 비틀즈의 ‘let it be’를 적어냈다. 수년째 나의 통기타 연습곡이었던 터라 첫 장만큼은 악보없이도 줄 위를 더듬을 수 있을 만큼 친밀한 노래지만 여전히 완주할 실력을 갖추지 못해 간절함과 애틋함마저 듬뿍 서려있는 사연있는 곡이었다. 앞선 신청곡들이 몇 차례 지나가자 곧 아름다운 피아노 전주가 바의 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잔잔한 주황색 빛 조명 속에 코코아 향이 나는 달콤쌉싸름한 칵테일과 비틀즈의 조합이라니. 나조차도 몰랐던 또 다른 내 취향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혼자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건 꽤 오랫동안 간직했던 로망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비가 와서 기분이 꿀꿀하다는 별 거 아닌 이유로 불쑥 이루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대단치 않은 작은 도전과 성공에 괜히 마음 한켠이 간지럽게 말랑거린다.


한가한 시간대인 덕분에 테이블 너머 사장님과 소소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20년 역사를 지닌 이 lp바의 3대째 주인장이시라고. 사장님도 한 때는 내가 앉은 자리의 손님으로 음악과 술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건네지는 말 속에 이 공간을 아끼는 다정함이 가득 배어 있어 따스한 온도마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구나 자신이 정말 아끼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굴에 행복하다는 표정을 함박 짓게 마련이다. 그 표정은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살짝 두근거리게 만들곤 한다.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비틀즈의 노래도 끝나고 술잔도 비었다. 하루종일 곁에 머물던 눅눅한 먹구름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바를 나서기 전, 달큰한 계피향이 나는 파이어볼밤 한 잔을 주문해 마지막으로 속을 따뜻하게 덥혀본다.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이름 모를 신청곡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흥얼거릴만큼 넉넉한 여유도 차올랐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 음악 소리 대신 여전한 빗소리가 반긴다. 망설이며 내려왔던 지하 계단을 기분 좋은 리듬을 타며 다시 올랐다. 벽에 붙어있던 사진 속 비장한 모습의 뮤지션들은 다시 또 만나자고 하이파이브라도 해줄것만 같은 유쾌한 인상으로 바뀌어있었다. 문고리를 잡을 결심을 한 것 뿐인데 하루의 결이 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이불 속에 몸을 푹 묻었다. 코코아 향과 계피향이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듯 여운이 남았다. 작은 빗방울들이 쉼없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젠 내 마음에까지는 들이치지 못했다.


tip) 칵테일 : 파이어볼밤 10,000원 + 베일리스 밀크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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