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제대로 걸려서 끙끙 앓았던 연휴
그래도 길었던 연휴 덕분에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 <빅 아이즈>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자기 색깔이 분명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팀 버튼 감독이 아닌가.
<빅 아이즈>도 '과연 팀 버튼답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동화적인 뉘앙스가 강하고
아름다운 장면들로 꽉 찬,
볼거리가 풍부한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길래
더욱 흥미로웠던 이 영화는
여류 화가 마가렛 킨의 기막힌 사연을
다루고 있다.
여자의 사회적 진출이 어려웠던 1950년대 말
남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린 딸과 집을 나온 마가렛은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주말에는 공원에서
행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월터 킨이라는
화가를 만나는데 그는 화려한 언변으로
단숨에 마가렛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남편에게 양육권을 뺏길 처지에 놓인 마가렛은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며, 유머감각이 넘치고
친절한 월터 킨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처음에 이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마가렛이 그린
눈이 큰 아이들의 초상화, 즉 ‘빅 아이즈’가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월터는
그녀의 그림을 자신의 그림이라고 속여 판다.
자신의 그림을 빼앗긴 마가렛은 당황하지만
그는 여자 화가의 그림은 안 팔린다며
마가렛을 설득한다.
그의 마케팅 능력으로 '빅 아이즈’ 시리즈는
대 히트를 치고, 월터는 스타 화가로 등극한다.
그러나 부와 명예에 취해 월터는
점점 사악하게 변해가고,
자신이 진짜로 그림을 그리기라도 한 듯 행동하며 마가렛의 재능을 착취한다.
마가렛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지키려 애썼던 딸에게 조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숨겨진 비밀의 방에 갇혀 그림만 그리는
기계처럼 살게 된 것이다.
월터의 가학적인 행동이 극에 달하자
모든 사정을 눈치챈 딸이 엄마를 도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고,
마가렛은 딸과 주변의 도움으로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자신이 ‘빅 아이즈’의
진짜 화가임을 밝히게 된다.
1시간 40분의 러닝타임이
아주 짜임새 있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흘러간다.
이야기가 쉽고, 강렬해서
아픈 것도 잊고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쉽다고 해서 작품이
던지는 화두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내게 미술시장의 메커니즘과
여성의 자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이제는 모두에게 익히 잘 알려진
미술시장의 이면을 드러낸다.
화가는 재능만으론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언론과 비평가, 재력을 지닌 후원자와
능력 있는 마케터들의 합작으로
'의미 있는' 그림과 '명성'있는 화가가 탄생한다.
그러한 과정은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필연적인 부분이라
그 자체로 완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재주는 곰이 부리고 수익은 단장이
독차지하는 꼴을 목격하게 된다.
주인공 마가렛과 월터의 관계가 이런 틀의
극단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위 사진 속의 장면은 내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는 장면이다.
월터는 마가렛의 ‘빅 아이즈’로 더 큰 수익을
올리기 위해 저렴한 가격의 포스터와 엽서를
대량 생산하여 일반인들에게 판매한다.
대형마트 매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신의 그림과 앤디 워홀이 그려서 유명해진
캠벨 수프 캔 사이를 유령처럼 걸어가는 마가렛의 모습을 보는데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일러스트적인 요소와 팝아트적 성격이 강한
마가렛의 그림은 동시대의 스타 화가인
앤디 워홀의 그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마가렛이
다른 공산품들처럼 쌓여있는 자기 그림 곁을
그냥 지나가는 이 장면은 비록 짧지만
여러 의미를 함축하며 많은 질문을 던지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가렛이 본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그림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주변인이 된 모습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그림의 저작권을 잃고 억울한
처지가 된 안타까운 사연의 수준이 아니다.
마가렛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버렸고,
(비록 월터의 요구가 있었지만)
월터의 이름 뒤에 숨어버림으로써
그에게 흡수되었다.
그녀는 월터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의 요구대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손이 되었다.
월터의 조종에 따라 살면서 마가렛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능력을 잃게 되었고,
그렇게 자아를 상실한 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방 안에 갇혀 그림만 그리며
신체의 자율성마저 잃어버린 마가렛이
자주 멍한 상태로 우울감을 느끼는 모습은
자기를 상실한 사람의 모습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가렛에게 거짓을 바로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생각한다.
월터가 최초에 거짓말을 했을 때가 그랬고,
그 후에도 기회는 몇 번 더 있었다고.
그러나 그녀는 그의 거짓말을 묵인하고
계속해서 월터의 요구대로 그림을 제작함으로써
이 사기극의 공범이 되었다.
물론 시대가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걸
안다. 지금도 이혼하면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든데 약 70여 년 전이니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개되는 중간중간
마가렛에게 살짝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가 정말 오직 사회적 여건 때문에
월터에게 맞서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 중간에 그녀는 '조지아 오키프'를
언급하며 월터에게 반문한다.
조지아 오키프는 여자인데도 성공한 화가가
(그림이 팔리는 화가)가 되지 않았냐고.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자신의 재능을 믿고
세게 부딪쳐 볼 용기도 내지 않았는지
무척 안타까웠다.
십 년 가까이 가짜 인생을 살면서
결국 월터의 미친 발악의 끝을
보고서야 그녀는 어렵게 용기를 냈다.
한 마디로 바닥을 칠 때까지 간 거다.
더는 거짓을 유지할 수 없는 정도까지.
난 마가렛이 오직 월터가 무서워서
또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이름은 아니지만 월터의 이름을 달았을 때
그림은 돈이 되어 마가렛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윤택한 삶이 주는 안온함의 유혹.
마가렛은 자기만 입 다물면
별 문제없을 것 같은 안정된 삶,
그게 흔들리는 것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보다 보다
그게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돈으로 쉽게
해결되는지를 생각하면
그녀가 진실 앞에서 너무 쉽게 물러선 거
아니냐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안온함이 주는 달콤함 때문에
진실 앞에서 무력해지는 거 아닐까?
무의식 중에 자신의 영혼과 바꿀 정도로
안온함의 유혹은 강렬하다...
안온함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대가로 유지되는지는
늘 살펴서 생각해 볼 일이다.
마가렛의 이야기는 현대판 설화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의 행위가 정말로 의미하는 바를
미처 알지 못한 여인이 스스로 이름을 버린 결과,
타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자기 이름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
100년만 더 지나면 정말 20세기 설화가 될지도.
월터 역을 맡은 크리스토프 왈츠의
연기가 아주 대단하다.
극을 좌지우지하는 그의 호흡은
관객을 휘두르는 카리스마가 있다.
아아... 무엇보다 장면 하나하나가 다 그림 같다.
모두 사진으로 인화해서 액자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로 환상적인 비주얼이다.
첫 장면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데
의상부터 세트까지 50년대의 색감을
빈티지 파스텔 풍으로 선명하게 그려낸다.
팀 버튼은 팀 버튼이다.
by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