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리에타>: 말할 수 없는 비밀

by 이봄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비밀도 많은 사이가

부모 자식 사이 아닐까.



영화 <줄리에타>

부모 자식 간에 생기는 비밀의 필연성

주목하게 만들며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보면 알게 된다 ‘는 어른들의 말이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형편없는 대답의 클리셰가 아니라는 걸

아름답게 증명해낸다.




줄리에타 (엠마 수아레스)




12년 전 돌연 가출한 딸 안티아에 대한

아픈 상처를 지닌 줄리에타

딸을 찾아 헤매던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고

믿음직한 남자 친구를 만나

지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삶에 대해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그녀는

그런 자신의 과거를 애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



딸과의 추억이 남아있는 마드리드를 떠나

애인과 포르투갈로 이사하려는 찰나,

그녀는 우연히 마주친 딸의 옛 친구 베아로부터

안티아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토록 찾아 헤맸어도 전혀 알 수 없었던

딸의 행방을 알게 된 줄리에타는

딸이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혀

남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딸과 함께 살았던 옛 아파트로 돌아간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다시 시작되고

줄리에타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주소도 모르는 딸에게 무작정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려서 말할 수 없었던

나와 네 아버지의 이야기,

너와 나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난 시간들 속에서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했어야 할까...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이 있을까.

은근하게 감지되는 불안의 요소를 애써 무시하며

함께 하는 미래를 무조건 낙관하고 싶은 것이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들 아닌가.

줄리에타안티아의 아버지인 소안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랬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를 하던 스물다섯 살

줄리에타는 자신이 속한 세상과는 전혀 다르게

거친 바다에 나가 육체노동에 전념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어부 소안에게 대책 없이 끌린다.




젊은 줄리에타 (아드리아나 우가르테 )




마드리드행 야간열차에서 처음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 두 사람.

열렬한 구애 편지를 보낸 소안을 만나러

그가 사는 어촌 마을로 내려온 줄리에타는

소안의 가정부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날은 마침 5년째 코마 상태에 있던 소안의

아내가 죽어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이었고,

소안은 아내의 친구인 아바라는 조각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관계라는 것.




남편 소안의 집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는 소안의 모습,

자석처럼 서로를 달라붙게 만드는

강력한 육체적 끌림과 뱃속에 있는 안티아의

존재로 인해 줄리에타는 소안과 결혼한다.



그녀는 자신이 연구하는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율리시스를 동경하는 아가씨였다.

아름다운 칼립소가 약속한 영원한 젊음과 영생도

뿌리치고 돛을 올리고 위험을 향해 간 율리시스.

그가 사랑한 거친 바다 폰토스는

미지의 모험을 위한 길이었다.

그리고 청춘의 절정에 선 줄리에타에게는

소안이 바로 그 폰토스였던 것이다.




아바 (인마 캐스타)




줄리에타가 선택한 모험은 14년 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난데없는 가정부의 폭로로

줄리에타는 소안이 결혼 후에도

아바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된다.

줄리에타는 얘기 좀 하자는 소안을 뿌리치고

충격 속에 집을 나온다.

그런 아내의 태도에 실망한 소안은

그 길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사고로 죽고 만다.



누구보다 아빠와 가까웠던 안티아는

아빠가 왜 폭풍이 오는데도 배를 탔냐고 묻는데

줄리에타는 그런 딸에게

아침에는 날씨가 맑았다고 밖에

아무것도 더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건 남편이고,

그에 대해 어떤 사과나 변명도 듣지 못했는데

소안이 그렇게 떠나자 줄리에타는

자기 때문에 소안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줄을 붙잡았으면

좋으련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일인가.




안티아의 친구 베아와 줄리에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리게만 보였던 안티아가

놀라울 정도로 씩씩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한다.

넋이 나간 엄마를 대신해 고향집을 정리하고

여름 캠프에서 만나 둘도 없는 단짝이 된

베아가 살고 있는 마드리드로 이사를 추진한다.

줄리에타는 안티아와 베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회복하지만 안티아는 예민한 사춘기를

엄마만 돌보면서 보내게 된 것이다.



모녀는 늘 가까이 있었지만

서로 별로 말을 하지 않았고, 줄리에타는

안티아가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딸 안티아와 줄리에타




안티아는 부모에게서 받지 못하는 관심과

정서적 만족을 친구인 베아에게서 찾았고,

지나치게 의존하여 결국 베아를 멀어지게 했다.

안티아가 집을 나간 시점은 베아가

미국 유학을 떠난 직후이다.

사춘기 아이가 아빠도 없이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보살피며 유일하게 의지하던 친구마저

떠났으니 기댈 곳이 없어진 그 애가 종교단체를

찾아간 건 지극히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게다가 안티아는 아빠가 죽던 날의 전후 사정을

다 알면서 줄리에타에게 숨기고 있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아픈 엄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자신의 괴로움을 감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티아는 아빠의 죽음에

자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빠가 죽는 줄도 모르고 캠프에서 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줄리에타는 이 모든 사실을

안티아가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된다.

안타까운 이 모녀의 엇갈림은 부모와 자식이

어디까지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지,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건지 질문하게 한다.



줄리에타는 자신을 짓눌러온 죄책감이

딸에게 전염되었다는 생각에 내내 괴로웠다.

하지만 딸에게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 속에서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 인생에 대해 딸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쓴 편지인데 그걸 통해 자신과 화해한다.


모녀간에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줄리에타의 편지가 마무리될 즈음

그토록 기다리던 안티아에게서 편지가 온다.

그녀는 자신의 큰 아들이

강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제야 자신이 떠났을 때

엄마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깨달았다고 한다.

줄리에타는 슬픔과 기쁨 속에

딸을 만나러 간다.




소안 (다니엘 그라오)와 줄리에타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이야기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변하지 않는 완전한 결속감이

판타지임을 일깨워준다.



아이들은 부모가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나가는

완벽하고 능력 있는 어른이길 기대하지만

매 순간이 처음인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일에 서툴 수밖에 없는 부모는

자식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



직접 부모가 되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될 때

그 때야 비로소 자식의 마음에

자기를 아프게 했던 부모를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어린 자신의 눈에 엄청 크게 보였던

엄마와 아빠가 실은 자기처럼 인생이란 미로를

헤매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많은 시간 엄마를 원망하며 살아온 딸로서

엄마가 내게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의

무게를 생각하며 많이 울었고,

덕분에 한결 가벼워졌다.

새로운 시작이다.



by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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