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을 울게 만든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예외 없이 그랬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연이 나와서가 아니다.
신파라면 딱 질색이다.
히로카즈 감독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일상에서
영롱한 순간을 자주 포착해내는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눈물이 흐른다.
사는 게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닷가 시골마을 카마쿠라에 사는
세 자매 사치, 요시노, 치카에게
아버지의 부음이 전해진다.
15년 전 내연녀와 집을 나간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자매들은 이복동생 스즈를 만난다.
15살, 여중생 스즈는 벌써 어머니를 여의고,
이제 아버지까지 죽어 고아가 되었다.
홀로 남겨진 스즈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걸까.
세 자매는 생전 처음 본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고 스즈는 기쁘게 받아들인다.
영화는 스즈가 언니들의 집으로 이사 오고,
이들이 진정한 가족으로 깊이 결속해가는
일 년 사계절의 시간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언뜻 평범한 자매들이 서로 아끼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영화의 어느 것도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세 자매의 엄마는
혼자 남아 자식들을 키우는 게 억울했는지
자기도 집을 나가버렸다.
그게 맏딸 사치가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이런 사연만 들으면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그 상처로
말미암아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거나
복수심을 불태우는 주인공이 떠오르는데
세 자매는 그런 보편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들의 가정을 파괴한 내연녀가 낳은 자식을
어떤 내적 저항도 없이 선뜻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살자고 하다니,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비범한 선택을 평범하게 해내며 사랑 속에
살아가는 자매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에게 무책임한 부모란 일종의 자연재해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이 홍수나 지진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에 대해 내도록 자연을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자매들은 부모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못난 부모가 떠나버린 오래된 집에 남아
여름이면 마당에 심긴 매실나무의 열매를 따서
술을 담그고, 때가 되면 낡아진 문의 창호지를
새것으로 갈아주며 그곳을 자기들의 단단한
삶의 터전으로 가꾸었다.
인간이 재난을 당할 때 포기하지 않고
서로 도와 폐허를 극복하는 것처럼
자매들은 부모가 남긴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힘을 합쳐 자신들의 삶의 기반과 미래를
새롭게 일구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복동생 스즈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에게 스즈는 적대시할 대상이 아닌
보듬어야 할 트라우마 공동체의 일원이다.
한편 자매들의 부모는 자신들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값진 유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는데
바로 독립성과 삶의 자율성이다.
딸들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대신
‘효’라는 이름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부모가 떠난 집에서 자매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결정하며 각자의 삶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시켜왔다.
맏딸인 사치는 집과 동생들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 간섭하진 않는다.
이들에게선 매사에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속박 없는
인간에게서 풍기는 쿨함이 느껴진다.
자매들은 진즉에 자신들을 떠난 부모가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15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부고 앞에서 뒤틀린 감정을 보이지 않고
‘지금 부인이 세 번째 부인이래.’
‘와, 아버지 능력 있네!’라고 말할 수 있고,
수년 만에 만나는 엄마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대하며, 그런 엄마가 집을 팔려고 하자
단칼에 그럴 자격이 없음을 지적하며 거절한다.
자매들의 이런 태도는 주어진 삶의 조건을
좋다, 나쁘다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우리들의 관습적 사고에 도전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반드시 불행해져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사람도 그런 이분법적 잣대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세 자매는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언니 동생이고
어린 이복동생까지 키우는 착한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반장을 맡았을 정도로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인 맏딸 사치는
종합병원의 간호사인데 놀랍게도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유부남 의사와 사귀고 있다.
은행원인 둘째 요시노는 무능한 남자들과
퍼주기식으로 교제하며 돈을 빌려줬다 떼이고
일방적으로 차이길 반복한다.
막내인 치카는 시내에 있는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며 점장과 사귀고 있다.
가장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거 같지만,
점장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다 발가락을
일곱 개나 잃고도 또 산에 오를까 말까를
고민하여 그녀를 걱정시킨다.
하지만 사치의 불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욕정에 불타는 관계가 아닌
우정에 가까운 형태로 묘사되며 그래서 그 관계에
단순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기가 멋쩍다.
또 요시노는 사랑할 때 연인에게 대가를
바라면서 잘해준 것이 아니기에 그들이 떠나도
오래 아파하며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
씩씩하게 이겨낸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에게 돈을 떼이고 차였음에도
피해자의 모습으로 남지 않고 당당하다.
사람의 이런 모순됨,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이 영화는
주인공 사치의 입을 빌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변명이 아니며
상대에 대한 체념이나 낙담도 아니다.
자매들을 비롯한 바닷마을의 이웃들은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들 중 누구도 자기 삶에 벌어진 일에 대해
남을 탓하지 않는다.
자매들은 무엇으로도 부모를 탓하지 않고,
요시노는 자기를 등쳐먹은 남자들을 탓하지 않고,
자매들이 자주 찾는 단골 식당의 주인아줌마는
오래전에 집을 나간 남동생에게 억울하게
가게를 뺏길 처지에 놓였지만
그를 원망하는 말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일어난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그들이 자연스럽게
표현해서 그렇지 현실에서 보기 힘들뿐더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적 문법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을
아름다운 순간으로 치환해버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바람났다고, 엄마가 집 나갔다고,
내연녀의 딸이라고, 콩가루 집안이라며
이 자매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도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잘못도 아닌데
부모 때문에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나?
자매들 또한 서로의 삶에 대해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며,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내하며 지켜보고,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준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결함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로 가득한 자매들의 인생은
파행으로 치닿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그런 서사에 익숙하다.
그런데 자매들과 바닷마을의 이웃들은
문제가 있다고 삶이 꼭 망가져야 하냐고
반문하듯이 살아간다.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향이 있다고
알려주듯이.
이들이 자기 운명에 처신하는 방법이
내가 취해온 삶의 자세와 너무 달라서
나는 더 많이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울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들 수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거라고....
by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