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세상에...!
영화 <바바둑>은 내게 공포영화에서
감동과 위로를 받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모두가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고,
또 마음이 아팠는데
이는 내가 유난히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그게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아멜리아의 일상은
보는 사람에게 현기증을 일으킨다.
싱글맘인 그녀는 요양원에서
치매노인을 돌보는 간병인으로 일하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만 6살 된 아들 사무엘을 키우고 있다.
혼자서 생계와 살림, 육아를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과잉행동장애가 있는 아들은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문제아로 낙인찍혀 있다.
아멜리아는 그런 아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녀는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사무엘은 밤마다 무섭다며
아멜리아의 침대로 파고든다.
두 사람은 매일 밤 옷장 문을 열어보고,
침대 밑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다.
사무엘이 자기 방 침대를 놔두고
엄마 곁에 누워 침대를 혼자 다 차지하고,
이를 북북 갈고, 팔과 다리를 엄마의 목과 배에
올려놓는 통에 그녀는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
무엇보다 밤마다 반복되는 악몽이 제일 문제다.
그녀는 7년 전 사무엘을 출산하러 가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남편을 잃었는데
꿈속에서 사고 당시의 상황이 계속 반복되며
그녀를 괴롭힌다.
창백한 얼굴로 사지에 힘이 하나도 없이
움직이는 그녀가
노인들과 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든다.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그녀의 정신줄이
곧 끊어질 거 같아 조마조마하다.
그녀의 모습은 그 어떤 악령보다 더 무서운 게
독박 육아라는 걸 절절히 깨닫게 한다.
어느 날 밤, 사무엘은 책장에서 빨간색 표지에
‘바바둑’이라는 제목이 적힌 그림책을 꺼내와
읽어달라고 한다.
자신을 너와 나의 친구 바바둑이라고 소개하는
괴기스러운 생김새의 주인공이
밤이 되면 네 방을 찾아올 거라고,
곧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너는 나를, 죽음을 갈망하게 될 거라며
절대로 바바둑을 벗어날 수 없다고,
자신을 들여보내 달라고 이야기한다.
섬뜩해진 아멜리아는 그 책을 아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버리지만 사무엘은
바바둑을 무서워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매료된다.
아이는 끊임없이 바바둑 이야기를 하며
바바둑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해서
엄마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무엘이 엄마 주변에 있는 바바둑을
먼저 인지한 걸로 보이는데
바바둑에게서 엄마를 지켜줄 거라고 말하면서
말썽을 피우니 가엾은 아멜리아는
혼이 나갈 지경이다.
아이는 꽥꽥 거리는 소리로 쉬지 않고
엄마를 불러대고,
나무로 총 같이 생긴 이상한 장난감을 만들어
주변을 위협하는가 하면 높은 곳엘 올라가
보는 사람을 기절하게 만들고,
운전 중인 차 안에서 앞좌석을 발로 차는 등,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더니
결국 사촌동생의 생일파티에 놀러 갔다가
자신을 놀리는 동생을 나무 위에 있는 통나무집
밖으로 밀어서 떨어지게 하는 대형 사고를 친다.
이제 바바둑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아멜리아에게도 감지되기 시작한다.
내다 버린 바바둑 책이
초인종 소리와 함께 문 앞에 놓여있고,
다시 열어본 책의 내용은 달라져있다.
거기에는 아멜리아로 보이는 여자가
바바둑에게 잠식되어
키우던 강아지와 아들을 교살하고,
식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놀란 아멜리아는 책을 불태워버리지만
그 뒤로 바바둑은 책이 아닌 현실에
환영처럼 나타나 그녀를 괴롭힌다.
마침내 바바둑이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오고
그녀는 바바둑이 책에서 예언한 대로 행동한다.
본격적인 공포의 시작이다.
놀랍게도 말썽꾸러기 사무엘이 그런 엄마를
구하려고 그동안 익힌 말썽의 기술을 이용하여
바바둑에게 맞선다.
바바둑에게 잠식되어 자식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바바둑으로부터 구하려는
아들의 숨 막히는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아멜리아는 직장에 다니고 있고,
사무엘 또래의 딸을 키우는 여동생과
교류하며 지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을
누구 하고도 나누지 못한다.
그녀가 의지하고 싶은 여동생은
사무엘을 핑계로 언니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그녀를 돕고 싶어 하는 시어머니는 파킨슨병에
걸려 자기 몸도 가누기도 힘든 노파이다.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하루 종일 우는 아이의 시중을 들다 보면
내 입으로 밥 한 숟가락 밀어 넣을 틈도 없는
그런 날들의 연속.
사무엘처럼 과잉행동장애가 있지 않더라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토록 고된 법인데
그 모든 과정을 6년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시달렸을지는 안 봐도 훤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
분노와 좌절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늘 친절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런 그녀가 바바둑이 안으로 들어오자 돌변한다.
말도 못 하게 폭력적으로 난동을 부리며
아이를 죽이려 든다.
악령으로 표현된 바바둑은
독박 육아로 인한 고통의 절정에서 발견한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폭력성이다.
아멜리아가 사무엘에게 '네 머리통이 박살 나
으스러질 때까지 후려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하며 악을 쓰는
무서운 장면에서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공포스러운 상황이 조잡하거나
유치하게 표현돼서 그런 게 아니다.
아멜리아의 끔찍한 언행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아이의 계속되는 울음에 완전히 넋이 나갔을 때
내가 보였던 모습과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영화는 수면부족으로 돌아버린 여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그 아이가 나를 인내심의 최극단까지 거칠게
몰아붙일 때 그런 아이를 향해 가슴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충동은 얼마나 충격적인지...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에게
악을 쓰고 난 후 정신이 들면 심한 수치심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나 자신이 한없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찰나일지라도 아이를 헤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걸 어떤 엄마가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디다 말도 못 하고
자기 혐오감에 빠져 지내던 날들...
그때의 내 모습이 아멜리아의 모습에
오버랩되면서 이런 상황을 공포 장르로 풀어낸
감독의 재치에 웃음이 나오고
아멜리아가 안쓰러워 슬프기도 하더라.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자기만의 바바둑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세상의 많은 엄마들을 떠올려보았다.
또 바바둑은 지난 6년간 묵혀온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절망이다.
아멜리아의 집은 이 보다 더 창백할 수는
없을 정도로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똑 닮아 있다.
빛바랜 하얀색이 주조를 이루는 집은
헐벗은 그녀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
무의식을 상징하는 지하실에는
미처 처분하지 못한 죽은 남편의 유품이
그리움과 함께 갇혀있다.
그동안 남편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본 적도 없다고 말하는 아멜리아는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에 접근하는 것도 막아왔다.
그리움에 사로잡히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을까 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바바둑에 잠식되었던 아멜리아가 정신이 들어
아이를 지키려고 들자 바바둑은
그리운 남편의 환영으로 변신하여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유혹하는데
동반자살에 대한 그녀의 동경이 형상화된 것이다.
죽은 남편을 충분히 애도할 시간도 없이
고된 육아현실에 홀로 내던져진 그녀가
힘들 때마다 남편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억눌러왔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울다니...!)
한 마디로 바바둑은 아멜리아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외면하고 억압해 온
자신의 그림자다.
처음에 동화책 주인공으로 나타난 바바둑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나를 외면하고 무시할수록 나는 바로 너의 곁에서
점점 더 커질 거라고. 그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바둑 책을 불태우고 무시했다.
그래야 자신과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림자를 부정해도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는다.
내 안에 있는 어두운 욕망과 부정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영화에서 아멜리아에게 제압당한 바바둑은
사라지지 않고 지하실로 숨는다.
아멜리아는 그릇에 지렁이와 벌레를 담아
바바둑에게 먹이로 주며 함께 산다.
바바둑을 부정하며 살다가
바바둑에게 잠식당했기에
그것의 영향력이 강화되지 않도록 곁에 두고
관리하며 사는 지혜를 얻은 것으로 읽힌다.
이제 아멜리아는 아이를 잠깐씩
시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하고,
남편의 기일이라는 이유로 피해왔던
아이의 생일에 생일파티를 열어준다.
나는 이 영화가 남편 없이 독박 육아를 하는
여자들의 심리적 풍경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아멜리아는 아들 사무엘의 도움으로
죽음의 유혹을 이겨냈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뉴스에 이름을 올린다.
아멜리아의 이야기는
자식을 향한 완전무결한 사랑으로만 여겨지는
모성에 대한 판타지를 깨부수며
모성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만든다.
애 키우는 게 뭐가 힘드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by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