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그래픽 노블 작가인
오사 게렌발의 작품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는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인 내용이다.
수년 전에 데이트 폭력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 <7층>을
무척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이 책을 발견하고는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예상대로... 감동적이었다.
세상에는 정말 믿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부모들이 있다.
주인공 제니의 부모도 그렇다.
어렵게 마음이 통하는 짝을 만나 결혼해서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 제니.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행복하지만 이상하게 내면의 고통이
커져간다.
자신은 전혀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자기 아이에게 베풀면서
제니는 아물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걸 느낀다.
깊은 우울에 빠진 제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니는 경제적인 어려움 없는, 겉보기엔
평범한 중산층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녀의 부모는 아이를 키울 인격적 소양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제니는 만 4-5살 무렵에 이미
부모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고 깨닫고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일까지
어떻게든 혼자서 해내며 성장했다.
제니의 속마음도 모르는 부모는
아이가 뭐든 혼자 잘 한다고
주변에 자랑하고 그럴수록 제니는
부모에게 소외감을 느낀다.
제니가 성장함에 따라
그녀의 부모가 보이는 일상의 여러 모습들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인데
물리적 폭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고
사람에게 그 이상의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제니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나
어울릴 법한 가족 에피소드가 펼쳐지는데
무엇보다
제니가 자기 부모가 다른 부모들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며
더 큰 상실감과 좌절을 겪는 걸로 보였다.
제니는 한 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에도
개연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큰 충격에 빠졌을 정도다.
"넌 결코 내가 바라던 딸이 되지 못했어...
너하고 난 정말이지 서로 필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구나..."
친엄마에게 이런 이야길 들으면
어떤 심정이 되겠는가?!
제니의 부모는 왜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마 결혼이 뭔지,
육아가 뭔지 모르고 그냥 했는데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
자식을 키우는 걸 귀찮아한다.
아이의 우는 소리나, 투덜댐,
불만이나 요구 같은 건 전혀 듣기 싫고
인형처럼 존재하길 바라는 거 같다.
전혀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전혀.
제니는 유년기 인간에게 필수적인
애정과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고
무관심과 방임이라는 정서적 학대를
당한 것이다.
어린 제니가 어떻게든
엄마 아빠의 온기를 느끼려고
한밤 중에 일어나
부모의 침대로 파고드는 장면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때 부모의 등에서 맡은 향기,
제니는 그 향기를 잊지 못한다.
들었을 때 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근사한 작품 제목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니...
마음이 아팠다.
안타깝게도 제니의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 사이에서 잤는지 어쨌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제니의 엄마는 청소년인 제니를
성추행했던 동네 아저씨와 눈이 맞아
이혼하고 집을 떠나고 딸을 저주한다.
대학에 들어와 독립하게 된 제니는
정서적 결핍과 그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일탈을 일삼는다.
섹스와 약물, 술과 담배에 중독되고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람은 사춘기에만 방황하는 게 아니다.
20대가 돼서도 방황할 수 있다는 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
자기파괴적인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서른이 넘어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겨우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된 제니.
행복도 잠시,
아이를 키우면서 설명하기 힘든
내면의 고통을 느끼며 치료를 시작한다.
제니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상담치료를 받아봤지만
그녀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한 치료사를
만나지 못했다.
그토록 많은 상담사를 만났으나
이제야 '정서적 방치'라는 소견을
듣게 된 제니....
정신과 치료나 심리치료를 받을 때
환자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나에게 맞는 의사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자기를 치유하기 위한 제니의 노력,
그것이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제니가 자기 엄마를 닮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마침내 제니는 지난날과 화해한다.
이 작품은 내가 지난 수년간
읽고 보았던 많은 책과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엔딩을 보여주었다.
위의 사진은 마지막 장면인데
사실 이 앞부분부터 정말 압권이다.
하지만 꼭 직접 책으로 보라는 뜻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ㅎㅎ
리뷰를 쓰느라 잠깐 다시 읽어보았는데
여전히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로
아름답다.
사진만 보면 주인공 제니가
자기 아이들을 안고 있는 걸로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모두 제니다.
아기 제니부터 성인이 된 제니까지
모두 지금의 제니가 안아주는 모습이다.
.....
오사 게렌발 작가는 작품 활동을 통해
자기를 치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기 경험을 나눠줌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체험수기가 아니다.
예술작품이다.
그녀는 작가로서 아주 훌륭하다.
과거와 현재를 기막힌 타이밍에 교차하면서
주인공에게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스토리텔링의 스킬이 탁월하다.
투박한듯한 그림은 그녀만의 매력이다.
그리고 엔딩은... 작가의 천재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겠지만
^^
강력하게 추천한다.
ps.
책 말미에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쓴
편지가 소개되어 있는데
감동적인 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스웨덴에서는 북극광 현상을 볼 수 있다.
우주 광선과 대류권 위쪽의 자기권 플라스마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광경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광원의 방해도 없이 칠흑같이
어두워야 한다.
이는 곧 내가 책을 쓰는 방식이자 북유럽의
스토리텔링 전통에 대한 상징이다.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만이 진정 가장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있고
하늘로부터 쏟아져내리는 금가루의
향연을 누릴 수 있다.
by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