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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Dec 18. 2017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 너희들은 그대로인데....









이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주인공 와타나베처럼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새내기였고,
X세대라 불리는 구별된 청춘이었다.
스무 살 그때는
이 소설의 모든 문장을 사랑했다.
어느 한 구절 내 이야기가 아닌 것이 없었고,
내 주변에도 와타나베의 주변 인물 같은
친구, 선배들이 있었다.
유치한 말처럼 들리게 뻔하지만
내 20대는 상당히 하루키 소설 같았다.


<노르웨이의 숲>
하나의 가이드북이기도 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일본 문학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고,
여기 나온 음악을 들었으며,
와타나베가 읽은 영미소설들까지
다 찾아 읽었으니까.
그렇게 만난 것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였으며 둘은 나란히
내 인생의 소설이 되었다.


그 뒤로 책장은 오래 덮여있었다.
삼십 대 초반까지는
가끔씩 아무 데나 펼쳐서
잠시 읽기도 했던 거 같은데
그 뒤론 다시 열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던 나이가 되어,
스무 살 그때의 두 배가 넘는 나이가 되어
다시 읽은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지나온 세월의 힘을 실감하게 했다.
나는 너무 변했다. 


만으로 열아홉에서 스무 살이라는  
성년으로서의 삶의 도입부에서
청년 와타나베의 눈에 비친
세계의 부조리함과 불가해함은
그 또래의 젊은이라면 시대를 막론하고
대부분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집과 학교, 사는 동네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고등학교까지 다닌 젊은이들에게
세계란 대체로 교과서에서 배운
'당위적인 모습'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의 가설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상에 대해 잘 안다고 믿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게, 그러니까
세상이 그렇지가 않더라는 걸 깨달아가며  
소위 '현실'이라는 것에 적응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현실에 적응하면서
20대를 지나 삶의 다음 단계들을 거치면서
와타나베와 나를  슬프게도 하고,
아득하게도 만든 이슈들은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아, 말하려니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
와타나베 같은 아들을,
미도리와 나오키 같은 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처지가 되고만 것이다.
(비록 내 딸은 일곱 살이지만 내 친구 중 한 명에게는
정말로 대학교 1학년생 아들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며
주인공들의 입담에 많이 웃었고 (귀여웠다.)
또 그들이 시련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에
(지켜보는 어른으로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어느 때는 나를 나오코에 대입했다가
다른 때는 나를 미도리에 대입했다가
그렇게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나날을 보내던 이십 대의 내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떠올려보게 되더라...
주인공들의 삶과 그들을 사랑했던 젊은 나를
 마주하며 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 자신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잊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소설이 지금의 나에게
예전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함에
처음엔 당혹스러웠고, 민망함마저 느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런 변화가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는다.
오히려 젊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 소설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달까.


와나타베의 소년기는 절친인 기즈키의
자살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죽음이었다.
삶의 그러한 가능성은 소년 와타나베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전까지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해오던,
 세계에 대한 그의 이해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삶이 죽음의 대극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새로운 인식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의 불가해함을
실감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고,
낯선 세상에서 이방인 같은 심정으로
세계를 겉도는 모습을
하루키는 아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춘은 걷는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와타나베는 나오코, 미도리와 함께,  
또 혼자서 많이 걷는데
목적 없이 걷는 이미지는 청춘의 전형이다.
청춘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다.
나도 그때는 한강시민공원을 비롯해  
서울 도심의 많은 곳을 걸었다.
한밤중에도 막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한 겨울에도 잘도 걸어 다녔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 너무 많았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걸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제 와서 그렇게 해석한다.


이 소설은 사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는지를 상기시킨다.
소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기즈키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어른이 되어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 생존자가 아닌가 싶다.
청춘의 강을 무사히 넘은.


청춘의 어떤 경험은 인두로 찍은 듯이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뒤에 이어지는 성년의 삶의 기저에 깔려
오랫동안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37살의 와타나베는 결국
희미해진 그 기억을 소환해냈다.
이 소설을 쓸 당시의 하루키가
와타나베와 비슷한 나이였다고 알고 있다.
어떻게 스무 살 그때의 감성을
이토록 생생하게 오래 간직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 그지없다.


<노르웨이 숲>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인
첫사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하면 애틋한 마음이 들지만
예전처럼 좋은 현재 진행형의
사랑일 수는 없다.


청춘의 양상을 특유의 감수성으로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한

'청춘 소설'의 대표작으로
이 소설에 대한 내 이해가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여담인데,
내가 이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미도리나 와타나베가
내 부모님처럼 60년대 학번이라는 사실에
크게 놀랐는데, 30년이란 세월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20대들에게는 와타나베나 미도리가
자신들과 동일시되지는 않고
그저 옛날 젊은이들로 보이려나?
요즘 20대들의 독후감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번역본의 차이도 좀 있는 거 같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유유정 번역의 <상실의 시대>로 읽었고,  
사진 속의 책은 최근에 읽은
양억관 번역의 <노르웨이의 숲>이다.
다시 읽는데 예전과 느낌이 너무 달라서
이게 정말 내가 나이 든 탓이기만 한 걸까 싶어
서점에 갔을 때 이전 번역본을 찾아봤는데
번역가에 따른 뉘앙스의 차이도 분명하다.

유유정 님 번역본이 좀 더 무게감이 있고,
양억관 님 번역본은 더 가볍게 펼쳐진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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