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당시부터 입소문으로
평이 좋게 났길래 무척 궁금했는데
드디어 이 영화 <종이달>을 보게 되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옛날 <산타페>라는 누드집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전설적인 미소녀
미야자와 리에가
중년의 연기파 배우가 되어
이 작품에 등장한다는 사실에
더 흥분했던 거 같다.
드라마, 서스펜스 장르로 구분되는 이 영화는
평범한 주부인 한 여자가 금융사기범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숨 가쁘게 펼쳐놓는다.
미리 말하지만
미야자와 리에는 여기서 정말 대단했다!
여타의 일본 영화와는 달리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빠르고
그에 따른 인물의 변화가 무척 흥미진진해서
보는 내내 긴장하며 재미있게 보았지만
한편으론 인물의 심리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전업주부인 리카는 착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늘 일 때문에 바쁜 남편에게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결혼한 지 4년 정도 지났지만
이들 사이엔 아직 아이가 없다.
은행에서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하던
리카는 계약직 사원이 되고
일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는 건 아니다.
리카의 남편은 수완이 좋은 직장인으로
이들에겐 경제적 어려움도 없다.
그런데 무엇이 이 안정된 삶으로부터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을까?
영화를 보고 리카의 행동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일탈이 삶의 기쁨을 느끼기 위한
작은 몸부림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우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렇다면... 삶의 기쁨은 뭘까....?
저마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주인공 리카의 경우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데 있었던 것 같다.
나로 인해 행복하게 웃는 누군가를 보는 것....
내가 그의 삶에 기여한다는 느낌....
영화는 학창 시절 리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던
중학생 리카는 큰 재난이 나서 어려움에 처한
해외 어린이들을 돕자는
학교의 모금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에게서 오는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는 리카.
그러나 그런 리카와 달리 반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그 일에서 멀어져 간다.
안타까움을 느끼던 리카는
반 친구들의 몫까지 내기 위해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그 일로 인해 학교 전체의 모금운동 자체가
중단되고 만다.
현재의 리카는 계약직 사원이 되고 받은
첫 월급으로 남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커플룩으로 자신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시계.
비싼 것은 아니지만
첫 월급으로 하는 의미 있는 선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편은 고마워는 하지만
아내가 하는 일을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며
그 가치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며칠 후 이 착하지만 무신경한 남편은
보너스를 받은 건지 뭔지 즐거운 마음으로
아내 리카에게 무려 '까르띠에 시계'를 선물하는데
....
선물을 받아 든 리카는 어딘지 주눅이 들어 보였다.
리카는 대학교 등록금을 낼 수 없어
사채를 쓴다는 한 남학생을 돕기 위해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불우한 해외아동에게 성금을 보내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쳤던 것처럼.
시작은 학비였지만
그 애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 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애의 사랑을 받기 위해
리카는 점점 더 큰돈이 필요하게 된다.
조신하면서도 어딘지 소심해 보이고
예쁘지만 다소 멍청해 보이는 얼굴로
나쁜 일이라곤 무서워서라도 못할 거 같은
그런 얼굴로 점점 대담한 범죄를
실행해 나가는 리카를 보는데
과연 사람이란 알 수가 없는 존재인가 싶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리카의 일상은
파괴되어 간다.
남편을 속이고, 직장 동료들을 속이고
끝이 분명한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매일매일이 비슷한 결혼생활과 직장생활의
쳇바퀴 속에서 일탈이 주는 짜릿한 쾌감.
그 두근두근하는 긴장감은 어쩌면 리카에게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선한 마음이
범죄로 이어지는 과정이 안타까웠다.
일탈을 할 때 그녀는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삶을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결코 수습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로서는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과연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을까....
나는 누구나 가슴에 작은 우물을 하나씩
간직한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우물이 우리를 활기차게 만드는
기쁨의 생명수로
늘 가득 차 있다면 좋겠지만
어른이 되어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대체로 우물은 텅 비고
종국에는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은 빈 우물을 의식할 만큼의
여유도 갖지 못한 체
기계적으로 살아내기 바쁘지만
문득 빈 우물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으로 그걸 채워야 할까....
살아있다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리카의 가슴속에 생긴 커다란 동공 같은
빈 우물을 가만히 상상해본다.
그녀의 행동을 두둔할 생각도 없고
딱히 동정심을 느끼지도 못하지만
남편이 선물한 까르띠에 시계를 손에 들고
애매한 표정을 짓던 리카의 얼굴과
낯선 이국땅에서 인파 속으로 사라지던
그 뒷모습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림으로 그린 바다에 뜨는 종이 달도,
그대가 나를 믿어 주면 진짜로 보이지요.
만든 나무에 걸린 그림 속의 하늘도,
그대가 나를 믿어 주면 진짜로 보이지요.
그대의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값싼 축제에 불과해요.
그대의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놀이터의 멜로디 라오.
그것은 서커스의 세계,
만든 물건에 불과해요.
그러나 그대가 나는 믿어 주면
진짜가 되어 버리지요.
- <It's Only A Paper Moon>
music by Harold Arlen and lyrics by
E. Y. Harburg and Billy Rose.
by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