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 : 안분지족은 꿈이어라

by 이봄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작명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제목이 주는 느낌으로 미루어보아)

잔잔하면서도 여운이 있겠군,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할 수도 있겠어, 라는 생각을 했었다.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들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결국 보게 되고야 마는 그런 영화,

그렇게 며칠 전 늦은 밤에,

생뚱맞게, 갑자기,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리뷰를 쓰려고 보니,

엉뚱하게 장시호와 김민희가 떠오른다.



한 뉴스에서 장시호가 검사들과 오빠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검사들이 그녀에게 아이스크림도

따로 사준다고. 수사에 협조적이란 뜻인데,

그녀가 조사실에서 검사들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장면과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김민희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뉴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가정을 파탄 낸 불륜녀로

지탄받으며, 잘 나가던 커리어를 제 손으로

망쳤다고 안타까움을 사던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예기치 못한 일들이 다가온다.

누구나의 삶에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들, 그것이 사람이든, 상황이든

겪어내며 변화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로구나,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그런데 자주 잊게 되는 그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가.




나탈리 (이자벨 위페르)




주인공 나탈리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일하는

워킹맘이고, 철학교수인 남편과 성년이 된

딸,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는

보통의 파리지앵이다.



그녀의 삶은 대도시에서 중산층으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공이 철학인 관계로 남들보다 철학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랄까.



보통 사람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우리들 대부분처럼 그녀의 삶에도 가시가 있다.

너무 행복하거나 평범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우리의 일상을 쿡쿡 찔러대는

작은 가시.

불안증세로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불러대는

친정 엄마가 그런 가시 같은 존재다.







왕년에 모델이었다는 이 초로의 여인은

자기가 딸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모른다.

기댈 곳이 딸 밖에 없는 가여운 여인일 뿐.

그녀 자신의 삶도 고단했던 게 사실이고.



자살 시도를 하고, 값 비싼 옷을 사 입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것인지

사고를 치지만, 이 역시도 일상이 된 지 오래라

나탈리는 무던히 받아넘긴다.







사는 게 대단히 재밌지는 않을지라도

제자들에게 존경받으며

자신의 일에 보람과 자긍심도 느끼고,

부모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를

감당할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고,

남편과도 무던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나탈리는 안분지족하며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소 무감해 보이는 굳은 표정 뒤로

그녀는 간절히 현상유지를 갈망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안타깝게도 삶은 현상을 그냥 유지하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수년째 안정된 판매고를 유지하며

나탈리의 체면을 지켜주던 그녀의 철학교과서는

시대에 뒤쳐진다는 평을 듣는다.

편집자들은 그녀에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책을 개정하고, 표지도 바꾸자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나탈리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운명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믿었던 남편의 불륜.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달라진 관계.

그렇게 다가온 변화에 대한 삶의 요구는

거칠고 강력했다.



어쩌면 나탈리는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화가 두려워서 애써 모른척하며

현상이 유지되길 간절히 바랐을 뿐.

그래서 남편의 고백을 듣고 내뱉은 그녀의

첫마디가 '그걸 왜 얘기하냐'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일은 다가와 버렸고, 그제야 나탈리는

변화를 겪으며 다른 선택을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본다.



어째서 그녀는 남편과 헤어진 후에야

친정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냈을까.

엄마의 존재가 자신의 결혼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말이다.



남편은 떠나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완전히 혼자인 듯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손주가 태어난다.

새로운 정체성이 다가온다. 할머니라는.

다가오는 것들...







흥미로운 건, 나탈리가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는데 함께 하며 길동무가 되어주는 건

가족이 아닌 그녀의 제자라는 것이다.



한 때 학생이었고, 이제는 동료처럼 가까워진

제자는 그녀를 가까이서 따르며 이제는 역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을 준다.

아름다운 사제 관계다.



철학도로서 왕년에 공산주의자였던 나탈리.

지금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고교 교사로

살고 있는 그녀의 삶의 한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제자의 따뜻한 촌철살인은 그녀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철학한다.

교과서에 박제된 명제가 아닌

삶과 함께 숨 쉬는 철학을.

고통과 불확실성에서 똑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우리 모두의 삶을 의미 있게 붙들어주는

그런 철학을.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

파스칼의 <팡세> 중.



나탈리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읊조리는

파스칼의 <팡세>와 알랭의 <행복론>의 구절은

그녀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외침이 된다.

삶과 철학이 하나가 되는 순간들을 지나면서

고통은 그녀를 승화시킨다.



이제 표면적으로 나탈리는 중년의 이혼녀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교과서의 집필자이자,

한 아이의 할머니 일지 몰라도,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녀의 내면은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더 고양되고, 충만해졌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대학교만 가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온전히 갖게 되리라

막연히 믿었던 거 같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게 주어진 선택권이란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감당해낼 것인가

정도구나 깨닫는다.



그렇게 나탈리의 이야기는

사람이 철이 드는 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님을,

어쩌면 죽을 때까지 거듭되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이 영화는 그냥 긴장을 좀 풀고,

화면이 흘러가는 대로,

거기다 자신을 맡긴 체 보면 좋겠다.

영화에서 무엇이 내게 다가오는지

가만히 느끼면서....



파리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가정과 교실의 풍경도 흥미롭고,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저런 철학수업을 받았음 싶고.

나탈리가 시골에서 대안적인 삶을

살고 있는 제자를 만나러 가서

마주하는 자연의 풍경도 너무너무 아름답다.



영상미가 뛰어나서 안구정화 제대로 했는데

알고 보니, <수면의 과학>, <미드나잇 인 파리>,

<멜랑콜리아>의 제작진이 총출동했더라.



또 <스틸 앨리스>를 찍은 데니스 르노어가

촬영감독을 맡았는데,

이 분은 중년 여성의 심리를 카메라에 담아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거 같다.



<스틸 앨리스>에선 치매로 지력을 상실해가는

중년의 언어학자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의 모습을

정말 아름답고도 생생하게 그려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또 한 건 해냈다.







환갑이 넘은 여배우와

중년의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만들어낸

감독이 누군가 하고 봤더니

서른다섯 살의 젊은 여자 감독이었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 대단하다.



철학과 이야기가, 영상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맞물리고 서로 녹아들게 만든 영화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철학이 삶에 대한 시가 되어 영화로 나타났다.





포스터.jpg




p.s

나도 65세에도 이런 뒷모습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by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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