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드 아스트라>는 SF 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스타워즈>나 <스타트랙>같은 정통 SF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에 가깝다. 우주는 주인공이 실제로 여행하는 물리적 공간이자 내면 여행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주인공 로이의 내적 성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버지로부터의 심리적 독립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문제는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 아들이 50대 중년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찾으러 어두운 우주를 헤치며 태양계의 끝에 있는 해왕성까지 가는 과정도 숨막힐 정도로 갑갑했지만, 그 보다 더 나를 갑갑하게 한 것은 이 늙은 아들이, 여태, 나이 50이 되도록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우주 비행사로 로이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우주의 지적생명체를 찾으려는 '리마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밖에서 큰 일을 하기 위해 처자를 버리고 집을 떠난 아버지의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다. 버림받은 다른 많은 자식들처럼 로이에게도 아버지의 떠남과 부재는 상처로 남았다. 부모에게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가 어디 있겠나? 재미있는 사실은 로이가 그런 아버지를 쫓아 자신도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주 비행사가 되긴 했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자식을 낳지 않았다. 자기가 받은 상처를 자식에게는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버린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행한 그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그로 하여금 자기가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로이는 만사에 '무감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비행 실력이 매우 뛰어난 우주 비행사로 어떤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심박수를 유지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의 공포스런 상황에서도 그의 심장은 결코 빨라지지 않는다. 로이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최적화된 몸과 정신을 가진 훌륭한 우주 비행사일지는 몰라도 감정이 거세된 사람으로 보인다. 화가 나도, 기뻐도, 슬퍼도, 그는 늘 한결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로이의 아내 이브는 그런 그에게 질려서 그를 떠난다. 감정적인 교류 없이 타인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이브를 사랑하고, 이브와 온전히 소통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떠나는 그녀를 붙잡지도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다고 바라지만 결과적으론 상처를 입힌다.
로이는 왜 우주 비행사가 되었을까?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법 한데 말이다. 그냥 단순히 본인도 우주에 관심이 많고, 그 분야에 재능과 소질이 있어서 선택한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서 선택한 게 아닐까? 왜 꼭 그렇게 떠나야만 했는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면서까지 반드시 이루고 싶었던 그 꿈을 진심으로 이해하면 아버지를 용서하고, 미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아버지를 이해할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날마다 꼬박 꼬박 나이를 먹어가며 어른의 현실을 살아내느라 곁에 있지도 않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충분한 여유도 없었을테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아버지와의 화해는 미해결 과제로 무의식 저편에 남게 된 게 아닐까? 이제 50대 중년이 된 그는 무기력하고 우울해보인다. 주어진 임무는 잘 수행해내지만 의욕이 넘치거나 직업적 야망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늘 하던 일이니까 기계적으로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 비행사라는 직업적 요구에 맞추며 최고가 되어 가는 동안 그는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버지와 똑같이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다. 사람들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있고, 사랑하는 아내가 떠나는데도 속수무책이다. 현재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인데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른다. 이게 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은데서 시작된 불행 같다. 사랑을 주고 받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이런 인간이 된 건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인류를 위협하는 전류 급증 현상인 써지 사태가 일어나고, 로이는 그게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실험 때문이란 소식을 듣게 된다. 오래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태양계 저 끝, 해왕성 근처에서 여전히 살아있단다. 그 아버지를 만나서 실험을 중지시키고, 지구를 구하라는 미션이 로이에게 주어진다. 의심할 여지 없이 로이가 클리포드의 아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미션이다. 문제는 써지 때문에 우주 비행이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왜 써지 사태가 일어나게 한 것일까? 아버지를 찾아 지구에서 달로, 달에서 화성으로, 화성에서 해왕성으로 우주선을 수차례 갈아타며 가는 과정에는 갖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목숨을 걸고 그 난관을 헤치며 먼 길을 가는 동안 그는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 영웅인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실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서 제 멋대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동료들을 살해하기까지 한 것이다. 도대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신만고 끝에 찾은 아버지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버려진 폐우주선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써지를 막아보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노화로 인해 백내장까지 생겨서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아버지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이 우주선에서 혼자 지낸 것일까?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왜, 왜,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걸까? 이 불쌍한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지적 생명체를 찾아 우주로 갔지만 오랜 탐사와 연구의 결론은 그런 존재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적 생명체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매달린다.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전까지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써지 문제를 해결한 로이는 아버지 클리포드를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고자 한다. 하지만 클리포드는 오히려 로이에게 함께 남아서 지적 생명체를 계속 찾자고 설득한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로이는 기가 막히고 가슴이 미어진다. 아버지는 로이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 황량한 우주에 아버지를 이대로 그냥 두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로이는 아버지를 끝까지 붙들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실패자로 만들지 말라며, 제발 놓아달라고 절규하는 아버지를 억지로 데려갈 순 없었다. 마침내 로이는 아버지를 놓아준다. 그는 우주 저 멀리 사라져간다.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로이는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왜 그랬냐고. 왜 계속 했냐고.
아버지와의 안타까운 재회 후에 그는 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평한다. "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평생을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아들은 이 말이 자신의 삶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이제는 정말 아버지처럼 살아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고백한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지할 거고, 그들이 나의 짐을 나눈 것처럼 나도 그들의 짐을 나눌 거예요. 나는 살아갈 거고 사랑할 겁니다." 그리고 그는 떠나버린 아내에게 다시 연락해서 만난다.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는다.
클리포드는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명문 MIT를 졸업했고, 리마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전까지 실패를 모르고 성공가도를 달려온 인물이다. 그는 영웅으로서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우주로 출발했다. 우주의 끝없는 어둠과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태양계의 끝에서 자기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마치 내 아버지라도 되는 양 클리포드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느꼈다. 그가 아무도 없이 홀로 우주에서 살아온 긴 세월은 아무리 그가 자처한 것일지라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가 가족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벌을 이런 식으로 이미 다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꿈과 명예에 저당잡혀버린 인생이 불쌍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강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로이는 아버지의 인생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대로 보내주었다.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삶이 있고, 자기에게는 자기의 삶이 있는 것이다. 각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쓰기까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의 로이가 그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가 준 상처에 연연하는 모습이 답답하고 싫었다. 그렇지만 나 역시 아직까지도 내 삶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에 대해 부모 탓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어릴 때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지만 았았어도, 아버지가 가부장적이지만 않았어도, 엄마가 나를 좀 더 안아주기만 했어도, 기타 등등... 부모님이 내게 필요한 이상적인 방식으로 날 키우지 못했기에 이후에 이어진 내 삶에 지속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은 얼마만큼 진실일까? 모든 게 부모 탓은 아닐지라도 근본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는 생각은 또 얼마만큼 진실일까? 이 질문으로 지난 내 삶을 정직하게 돌아볼 용기가 내게 있긴 한 걸까? 게다가 요즘에는 효도라는 미명 하에 연로한 부모님의 삶을 내가 원하는 스타일에 맞추려고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하는지... 로이가 클리포드를 떠나보내는 모습을 떠올리니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건 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도 로이도 조금 더 일찍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났으면 좋았을테지만 어쩌면 중년인 지금이 진정으로 부모로 부터 독립할 수 있는 적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내 인생에 대해 다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어린 나를 키울 때 부모도 온전한 어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도 아니까. 영화에서 로이는 고통스럽지만 아버지를 떠나 보냈고, 홀가분하게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현실의 나에게는 다른 과제가 더 남아있다. 나이드신 부모님에 대한 나의 의무는 어디까지인지 스스로에게 대답해야 한다.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힘든데도 계속 일을 하려 들고, 아무리 충고를 해도 듣지 않는 당신들을 나도 로이처럼 놓아버리고 싶다면 나는 불효막심한 자식일까?